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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알 Sep 23. 2021

사탕, 기억의 조각


남편과 내가 코를 박을 수 있는 사탕가게.


● 사탕

한가위 달맞이에 실패하고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라온 인친님의 문장에 눈이 멈춘다.

사탕가게라... 나는 사탕을 즐겨 먹지 않는다. 옥수수 강냉이나 소금 간이 조금 되어 있는 비스킷 종류를 좋아하는 촌스러운 입맛이다. 왜 그러는 건지,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입 안에서 구르는 사탕의 딱딱한 촉감이 부담스럽다. 특히 입천장에 닿는 거친 느낌이 불편할 때가 많다.


어릴   사탕 하나를 입에 넣었다. 얼마나 달았는지 달큰하고 끈적끈적해진 '' 취해 정신이 혼미했다. 머리 ‘아찔했다. 기관지를 타고 단물이   구석구석 뻗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어쩌다 사탕을 먹게 되면 지금도 나는 차분하게 녹여 먹지 못한다. 반도 먹지 못하고 뱉거나, 최선을 다해  안에서 굴려 녹인  '꿀떡' 삼켜버린다. 달지 않은 사탕도 많이 있지만, 나의 기억 속에 있는 어린 시절의 사탕은 대부분 너무 달고 딱딱했다.


사탕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바로 내가 다섯 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 고작 다섯 살짜리가 얼마나 기억을 하겠냐 싶겠지만,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할아버지와 몇 가지 추억이 있다.


언젠가 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했다. "아니, 할아버지 얼굴이나 기억하니?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꼬맹이었는데 뭘 얼마나 기억할까!" 두 사람이 웃었다. 소중한 보물이 무시당한 것 같아 억울한 나는 할아버지와의 몇 가지 사건을 송사하듯 쏟아냈다. "맞아 맞아! 정말 그 일이 있었어. 아니, 얘가 정말 알고 있네. 신기하기도 하지. 어떻게 그 어린 꼬맹이가 그걸 다 기억하고 있다니!" 그제야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유아 기억상실증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아이가 커서도 오래 저장되는 기억을 6세에서 8세 정도로 보았다. 이후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 없는 실험이 이루어졌고 공통적으로 2세에서 3세 정도까지의 기억은 대개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물론 기억이 있는 경우에도 3세에서 7세의 기억에 비해서는 단편적 기억들이고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만 3세까지의 기억은 온전하게 획득되지 못한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를 삶의 초기 몇 년 동안의 기억에 공백이 발생하는 증상으로 '유아 기억상실증'이라고 부른다. 만 4세부터라 하더라도 기억들은 단편적이며 기억 역시 온전치 못하고 불완전한 경우가 많다.

[출처] 시선뉴스 http://www.sisu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652


3세 이전의 기억은 대부분 '유아 기억상실증'으로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잊었지만 그 기억들은 여전히 뇌 속에 남아 있는 것이 밝혀졌다. 이렇게 불온전한 것이 유아기의 기억인데, 나는 할아버지와의 시간을 어떻게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을까!


그건 아마도 엄마와의 대화 덕분인 듯하다. 한글을 깨친 후로 누구나 그렇듯 매일 일기를 썼다. 지금도 어릴   일기장을 보면  말이  많은 아이였던 것이 틀림없다. 일기장  페이지를 넘기는 일이 많았고, 대화문도 의성어도 제법 눈에 띈다. 특히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 노력이 보인다. 일기를 쓰기 이전에는 시도 때도 없이 종알거리는 아이였다고 한다. 오늘은  봤고, 무슨 소리를 들었고,  했는지 피곤한 엄마 귀를 만지며 계속 재잘댔다고…….


어린아이에게는 온통 신기한 것이겠지만, 눈앞의 것들이 일상이 되어버린 엄마에게는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엄마는 그 시답지 않은 나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들어주었다. 그 증거는 녹음테이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엄마는 우리 형제들과의 대화를 카세트테이프에 자주 기록했다. 어른이 된 지금 우리의 앳된 목소리를 들으면 "뭐가 저렇게 신기했을까!" 싶은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차를 보고 "엄마 차! 차!" 하며 흥분하는 오빠의 목소리, "엄마 이건 내가 만든 노래"라며 세상에 둘도 없는 '딸기 송'을 부르는 동생. 부끄러워하면서도 재잘대며 노래를 부르는 나.


"그래서 어땠는데? 그랬구나. 그래서? 또 뭘 했는데?"

엄마는 우리가 스스로 이야기를 주도하도록 했다. 한 마디라도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면 다음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열심히 호응하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예를 들면 "오늘 교회 주일학교 소풍 가서 수건 돌리기도 했지! 재미있었어?"가 아니라 "오늘 꼬맹이 뭐했지? 엄마한테 뭐 재미있는 이야기 해 줄 거 없어?"라는 식이다.


이렇게 낡은 테이프 속의 이야기를 들으면 조각일지언정 할아버지와의 기억이 내 안에 남아있는 이유가 조금은 납득이 간다.



● 쟈클쟈클한 할아버지

1984년 8월 동생이 태어난 꼭 1주일 뒤. 할아버지는 오 남매의 막내아들 손자를 보시고 눈을 감으셨다. 매미가 시끄럽게 우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할아버지는 오래된 지병이 악화되어 돌아가시기 전 몇 달 동안 사랑방에 누워계셨다. 그렇게 기력을 잃으시기 전까지 할아버지는 나의 소중한 친구이고 보호자였다. 몸이 쇠약해져 바깥일이 어려워진 할아버지는 늘 집에 머무셨다. 덕분에 나는 할아버지와 종종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할아버지는 옛사람 치고 키가 컸다. 180센티미터나 되는 장신이었다. "내가 만든 모시옷을 위아래로 쫙 대려 입고 중절모를 쓰고 집 밖에 나가믄 말이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키도 훤칠하니 참말로 멋지요잉!' 하드란마다. 어딜 가든 느그 할아버지는 참말로 인물이 좋았어. 머리는 얼마나 쟈클하니 숱도 많았든지..." 할머니는 일찍 사별한 남편을 떠올릴 때마다 늘 '멋있는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할아버지는 정말 멋진 분이었다. 몇 장 남아있지 않은 사진 속의 머리카락은 염색도 하지 않은 흰머리가 대부분이지만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맵시 있고 훤칠한 할아버지는 쟈클함 그 자체였다. 오똑한 코와 갸름한 얼굴, 훤칠한 키와 긴 팔다리는 지금 보아도 미남의 모습이다. 할아버지는 늘 한복을 입었는데,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당시 할아버지의 환갑을 갗 넘긴 나이였다. 생각해보면, 지팡이는 병든 당신의 몸을 의지할 버팀목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그 지팡이와 손녀딸의 손을 양 손에 잡고 종종 마실을 나갔다. 바닥에 붙어 다니는 작은 손녀의 손을 잡고 걷기 위해 대체 얼마나 허리를 굽혀야 했을까!


[참고] 전라도 사투리 '쟈클(자클)하다'
1) ‘자크르하다’는 ‘(그) 딱 알맞게 좋다’는 뜻을 가지는 말로 (최기호,『사전에 없는 토박이 말』참고), ‘자크르하다’가 “바람도 간새(동남풍)로 자크르하구나, 날씨 봐서 날 받았어.”와 같은 문맥에서도 쓰이는 것으로 보아, ‘옷’뿐 아니라 ‘딱 알맞게 좋다’의 뜻으로 표현할 수 있는 대상에 두루 쓰이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 국립국어연구원 온라인 가나다
2) 주로 섬유에 쓰이는 말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형태를 말한다.  [참고] 전라도 사투리 간단사전
3) 할머니는 옷맵시가 좋은 사람을 가리켜서도 '자(쟈)클하다'라고 표현했다.


● 고쟁이 속 사탕 하나

어느 계절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햇살이 따뜻한 낮이었다. 할아버지가 밤색의 스웨터를 걸치고 있었던 걸 보면 이른 봄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할아버지 손을 잡고 골목을 나섰다. ‘탁탁’ 땅을 짚는 지팡이 소리에 발을 맞춰 할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아빠보다 키도 손발도 모두 컸다는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큰 손을 잡고 걷던 때를 생각하면 나는 거인의 걸음을 따라가는 작은 꼬맹이였겠지.


집에서 마을 입구로 이어지는 골목길. 길의 중간 즈음에는 오래된 생강나무(산수유)가 있었다. 그리고 길 양쪽으로 앞집의 대나무가 있었는데 덕분에 골목길은 한여름에도 서늘했다. 다만, 바람이 불 때마다 들리는 스산한 소리는 내가 아는 온갖 무서운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대나무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크고 웅장한 한옥 한 채가 들어서기 전까지 나는 늘 눈을 질끔 감고 도망치듯 그 길을 빠져나가야 했다.


할아버지와 대나무 그늘을 지나 골목길 끝에 다다랐다. 그늘을 벗어나 마을의 큰길과 만나는 곳에는 커다란 벚꽃 나무가 서 있었다. 먼저 나온 할아버지 서너 명이 그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지금과 달리 그때는 동네마다 이런 풍경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어르신들은 여름에는 시원한 나무 그늘에, 겨울에는 햇살 따순 곳에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곤 했다. 그러다 지나가는 동네 아이들이 “안녕하세요!” 인사하면 “그래~! 학교에서 공부 잘했지? 요놈 많이 컸다.”라며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아이고, 우리 OO양반 나오셨는가!”

“오늘은 꼬맹이도 데리고 나왔네.”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낀 할아버지가 반갑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옆으로 앉으라며 할아버지와 내 자리를 마련했다. 자리라고 해봤자 10센티미터 정도 높이로 만들어진 직사각형의 시멘트 블록이었다. 수줍은 많은 나는 할아버지 바짓 자락을 잡고 바짝 붙었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아이고 저 놈 봐라. 허허허!” 다른 할아버지들이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에 더욱 얼굴이 빨개져 할아버지의 다리 사이로 몸을 숨겼다.


할아버지가 웃으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할아버지는 나를 무릎 위에 앉혔다. 뼈 밖에 없는 할아버지의 다리가 불안했는지, 나는 옷자락을 꼭 붙들었다. 얼굴 위로 내리쬐는 햇살은 따숩고 눈부셨다. 할아버지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 동안 나눴던 것 같다. 할아버지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우리가 앉아있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제법 그 길을 지났고 어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눴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리를 내어주던 할아버지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가만있어 보자! 내가 맛있는 거 하나 줘야지.”

한복 바지를 입고 있던 할아버지는 주섬주섬 바지 속을 뒤적이더니 커다란 알사탕 몇 개를 꺼냈다. 바짓 속 주머니는 얼마나 깊었는지, 한참을 이리저리 찾았다. 사탕은 꽤 컸다. 할아버지는 "고맙습니다 해야지!"라며 내 머리를 꾸욱 눌렀다.


사탕을 받았지만 나는 먹을 줄을 몰랐다. 할아버지가 질긴 사탕 봉지를 이로 '찌익' 뜯었다.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내 입에 "자, 아~아~" 하고 당신의 입도 같이 벌리더니 큰 사탕 하나를 입에 쏙 넣어 주었다. 하지만 사탕은 너무 컸고, 나는 입을 제대로 다물 수 없었다. "우어 어어... 어어어..."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할아버지는 사탕을 꺼냈다. 그리고는 당신 입에 넣어 '오도독' 깨물었다. 그중 작은 조각을 내 입에 다시 넣었다.


"맛있지?"

할아버지는 남은 사탕 조각을  오물오물 입 안에서 굴리기 시작했다. 그때 먹은 사탕이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를 보며 한없이 웃던 할아버지의 얼굴만 선명하게 남아있다. 사탕을 꺼내 주었던 할아버지의 비둘기색의 비단 한복 바지도.



● 박하 향기

오래전 할아버지 꿈을 꾸었다. 할아버지 생각을 한창 하던 중학생 때였다. 몸이 훌쩍 자란 나는 할아버지와 자주 놀러 나갔던 마을 공터에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사탕을 꺼내 주었다. 내 입에 하나, 할아버지의 입에 하나. 우리는 사탕을 하나씩 입에 물고 가만히 마을 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사탕을 먹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일어났다.

"할아버지 왜요?"

"이제 가야지."

할아버지가 웃었다. 같이 있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할아버지를 붙들 수 없었다. 꿈속에서도 할아버지는 함께 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는 걸 받아들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계속 나를 보며 웃었다. 시원한 웃음과 함께 박하향이 났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유일하게 즐겨 먹는 사탕은 박하, 민트향의 계열이다. 한 친구는 “치약 맛 나는 걸 왜 먹느냐”라며 입맛을 이해할 수 없다 한다. 박하사탕을 입에 넣으면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오물오물 먹었던 작은 사탕 조각이 생각난다. 깨진 사탕 조각처럼 그 시절의 기억은 온전하지 못하다. 드문드문, 조각난 기억은 꿈에서 나를 부를 때가 많다. 꿈에서 보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해내려고 애쓸 때마다, 몇 개의 장면으로 밖에 남아있지 않은 유년시절이 아쉽다.


만일 그때, 할아버지가 입에 넣어준 사탕을 살살 돌려가며 조심히 먹었더라면, 깨지 않고 내 힘으로 다 먹었더라면… 좀 더 온전한 할아버지와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오래 전 한 다큐멘터리 필름에서 손자를 등에 업고 차가운 히말라야의 얼음물을 건너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저 아이도 할아버지의 등 위에서 앙상한 뼈 마디를 느꼈겠지. 거친 숨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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