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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알 Sep 11. 2021

소심한 사람의 걷기

구파발 산책로 풍경

"작심삼일이 되면 안 돼."


아직 허리에 통증이 느껴지지만, 가볍게 산책을 하기 위해 이른 저녁을 먹고 나선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 긴소매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걷다 보면 몸이 더워져 긴 소매가 부담될지 모르겠다고 잠시 고민했다. 그때 머릿속을 재빨리 스치는 생각 하나. 


'요즘 같은 코로나 위기 시대에 콜록거리는 사람은 이유를 불문하고 경계 대상이 되지 않던가!' 


시절이 시절인지라, 감기라도 걸려서 병원에 가면 안 되지 싶어 두께감 있는 옷으로 골라 입었다. 요즘 나의 일상은 하늘길이 다시 열리면 당장이라도 일본 집으로 날아가야 할 '5분 대기조'의 삶인 터라, 무조건 건강해야 했다. 

 

집 근처에 조성된 산책로는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졸졸 흐르는 천을 따라 이어진다. 큰 쇼핑몰 뒤, 산책로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들였을 때 웅성웅성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산책로에는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걷거나 달리고 있었다.


여름보다 서늘해진 날씨 때문인지 운동하는 사람들은 나이를 따지지 않고 꽤 많은 수였다. 그중에는 제대로 운동복을 갖춰 입고 손목에는 운동량을 체크하는 시계나 기기를 달고 달리는 이도 있었다. 물론 나처럼 집에서 입는 편한 옷차림에 물 위의 청둥오리 가족들을 보거나,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하며 어슬렁어슬렁 걷는 이들도 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온 엄마 아빠, 백발의 구부정한 허리로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걷는 노부부, 뭐가 그리 좋은지 까르르 웃으며 재잘거리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 너도나도 다른 차림과 방법으로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마주치기도 하고, 같은 방향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는다. 재미있는 점은 모두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2020년에 전 세계인들의 공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마스크! 산책로에 모여든 사람들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일명 연예인 마스크라 불리는 검은색 마스크, 일본인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일회용의 흰색 마스크, 알록달록 꽃무늬부터 다양한 무늬가 가득 그려진 면 마스크, 한쪽에 필터가 달린 마스크 까지. 사람들의 입과 코를 가리고 있는 마스크의 종류는 다양하다.

 



산책로에는 주인을 따라 나온 반려견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개의 입모양에 꼭 맞는 '반려견용 마스크'를 쓰고 있는 녀석도 있다. 답답해하지 않을까 신기한 듯 바라보았지만, 마스크가 익숙한 듯 길 구석구석을 킁킁거리며 잘 걷는다.


그렇게 한참을 걷는다. 깨끗한 하늘을 보니 한가위를 일주일 남짓 남긴 달은 점점 차오르고 있다. 반환점인 산책로의 끝, 인공폭포를 돌고 있을 무렵이다. 뭔가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중년의 남녀 커플이 분수 앞 나무 울타리에 기대어 떠들고 있다. 남성은 최근에 만들어진 아치형의 다리 위에 팔다리를 번갈아 올리며 스트레칭을 한다.


"에잇! 시팔!"


마음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인지 갑자기 거친 욕을 내뱉는다. 다리를 지나던 나도 다른 이들도 깜짝 놀라 그를 힐끔 쳐다보는데, 함께 있던 여성은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다. 오히려 남성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깔깔대며 그를 놀린다.


그런데 이 두 사람,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은 채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 다리의 폭은 넓지 않아서 냇물을 사이에 두고 천변을 따라 이어지는 양쪽의 산책로에서 오가는 이들로 제법 북적이는 곳이다. 게다가 인공폭포와 제법 넓은 못이 있는 터라, 바로 뒤 산에서 부는 바람을 맞으며 잠시 휴식하기 좋아 인기가 많다. 나 역시 종종 이곳에서 가쁜 숨을 고르며 아무 생각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곤 한다.


그런 장소에서 지금 이 두 사람은 다리의 대부분을 점령하듯, 난간을 부여잡고 운동에 열심이다.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그들이 더욱 불편한 건,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을 눈, 코, 입을 환히 내보이고 있다. 이들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있다. 코로나 상황 이후로 타인의 코와 입을 제대로 보기 어려워진 요즘, 이렇게 적나라하게 온 얼굴을 내보이는 이들은 낯설다 못해 거부감마저 든다.

 

사람들은 그들을 못 마땅한 듯 쳐다보면서도 누구 하나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지나간다. 주위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과감하고 다소 거친 몸짓과 말투를 보아, 괜히 말을 걸어봐야 문젯거리가 될 것을 예감하는 듯하다. 행인들 모두 고개를 돌리거나 마스크를 쓴 입을 가린 채 멀치감치 걸어갈 뿐이다. 최근에 '마스크를 쓰라'는 다른 사람들의 요청에 분노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시민들이 늘었다는 뉴스 보도가 머릿속을 스친다. 보통 때라면 다리 위에서 사진도 찍고 쉬어가는 이들이 많지만, 오늘만큼은 사뭇 다른 풍경이다.


"엄마, 저 아줌마 아저씨는 마스크 안 했어요. 안 하면 안 되는 거죠? 맞죠?"


내 앞에서 엄마 손을 잡고 걷던 초등학생 나이로 보이는 한 아이가 작은 소리로 엄마에게 속삭인다. 아이의 엄마는 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리 위의 점령자들이 혹시라도 아이의 말을 들을까, 빠른 걸음으로 아이의 손을 잡아끌며 앞서 걸어간다.


공공시설을 개인 소유물처럼 독차지하고 있는 남녀의 모습이 물론 언짢지만, 이 순간 사람들은 그들이 무시하고 있는 '마스크', 공공 방역수칙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에 더 큰 노여움을 느끼지 않을까! 어린아이들과 어르신들이 거니는 산책로에서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모습은 '무책임한 자유'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스크를 벗고 상쾌한 밤공기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야 모두 같을 것인데, 다들 꾹 참고 있을 뿐이다. 불편함과 답답함을 감내하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함께하는 가족과 이웃,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한 최소한의 책임이자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역'임을 기억할 순 없을까!


누구나 마스크 없이 걷고 싶어요.
하지만, 꾹 참고 견디는 겁니다.
그날이 단 하루라도
빨리 올 수 있도록.

소심한 나는 여전히 요란하게 웃으며 다리 위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산책로의 시작점을 향해 돌아간다. 하고 싶었던 말은 속으로만 아우성인 채, 팔만 열심히 휘저을 뿐이다.

▲ 산책로로 내려가는 길
▲ 아파트 불빛과 가로수 조명이 켜지면 나방처럼 사람들이 몰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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