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걷는다.
일본에 들어온 날부터 바로 시작된 자가격리.
덩달아 나의 걷기도 멈춰버렸다. 매일 일과 중 하나였던 걷기를 할 수 없게 되니 불안했다.
그동안 코로나로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도 많다. 특히 걷는 시간은 과장 없이 90% 늘었다. 그만큼 이전의 나의 삶 속에 걷기는 늘 뒷전이었다. 봄학기가 시작되기 얼마 전 허리 통증이 재발하고서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본에 오기 전날까지, 태풍이 오는 날을 제외하면 매일 조금씩은 꾸준히 걸었던 것 같다. 덕분에 서울의 새벽 공기가 그렇게 시원한지, 시간대에 따라서 산책로를 찾는 세대가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낮시간에는 어린 아가를 유모차에 태우고 나온 엄마들이 대부분이었다. 해 질 녘부터 늦은 밤까지는 손 잡고 걷는 연인들과 운동복을 갖춰 입은 건 물론이고 반려동물까지 함께 나온 가족 단위가, 그리고 새벽에는 한산함을 선호하는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 많았다.
자가 격리 첫 째 날, 둘째 날. 시간이 갈수록 개학은 다가오는데 밀린 숙제 껴안고 발만 동동 구르는 아이처럼 마음이 조급해졌다.
"에이, 일본은 한국처럼 엄격하지 않아. 집 앞 편의점에 나가도 되고 간단한 산책 정도는 괜찮다고 하던데."
"집에만 있어서 어떡하니. 운동을 좀 해야 할 텐데. 답답하진 않고? 뭐 먹고 싶은 건 없니? 만들어다 줄게."
"내 주변 사람들은 자가격리 기간 동안 마음대로 돌아다니던데? 구청(区役所)에서도 전화 한 번 안 오고. 라인 어플이라던가? 매일 건강상태 입력하라는 것도 사실 말뿐이고. 누구 하나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어. 그러니까 너도 좀 돌아다녀. 아무도 신경 안 쓴다. 그러다 병나겠어."
2주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자가격리 기간 동안 집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내가 안쓰러운지 지인들이 걱정했다. 밥은 제대로 먹는지, 몸 불편한 곳은 없는지. 운동을 해야 할 텐데, 집에서 스트레칭이라도 하는 게 어떨지. 모두 한 마음으로 내 상태를 염려하며 살폈다. 딸처럼, 동생처럼, 언니처럼, 나를 걱정하는 그들의 마음을 잘 알았다. 나라고 그리웠던 골목 구석구석을 왜 걷고 싶지 않겠는가!
평생에 한 번으로 족하다 싶은 두 계절을 보내고 겨우 이곳에 돌아왔다. 그래서 터라 작은 실수로 나의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전 괜찮아요. 며칠만 더 버티고 자유의 몸 돼서 나갈게요."
격리기간 동안 나름의 루틴이 있었다.
먼저, 아침마다 창문을 열고 늦가을의 공기를 흠뻑 마신다. 11월의 도쿄는 아직 포근했고, 길 건너 쭉 가로수에는 노란 은행잎이 여전했다.
전기포트에 데운 물을 따뜻하게 한 잔 마시고, 과일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한다.
다음은 수업 준비. 오후 수업이 있는 날은 점심을 먹은 뒤 보통 책상 앞에 앉았다.
수업을 마치면 그날 수업 정리를 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 이해한 것 같지만, 다음 날 다시 보면 처음 만난 사람처럼 "누구... 세요?" 웃지 못할 상황을 몇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정리까지 마치면 시각은 보통 저녁 8시가 된다. 책상을 정리하고 기지개를 켠다. 이때부터 시작되는 나의 우스꽝스러운 운동 시간!
방과 수업을 듣는 작은 거실, 화장실을 오가는 것이 나의 동선의 전부였다. '이러다 걷는 것도 잊어버리는 거 아니야.' 자꾸 의사 선생님의 얼굴과 병원에 누워 치료를 받던 끔찍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꾸 무거워지고 찌뿌둥한 몸을 벗어나야겠다.
좁은 거실을 걷기 시작했다. 수십 번 걷고 또 걸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팔을 위아래로 휘두르며 걷는 내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언젠가 고가로 진입하는 꽉 막힌 도로에서 '특가 세일'이라고 크게 현수막을 걸어 놓고 음악에 맞춰 움찔움찔 걷고 춤을 추는 인형이 떠올랐다. 기왕이면 그 인형처럼 춤이라도 춰볼까. 혼자 사방으로 팔을 휘저으며 걷기를 반복했다. 사실, 춤도 스트레칭도 아니었다.
다음은 방으로 돌아왔다. 한쪽에 놓여있는 스테퍼(stepper)에 올라갔다. '하나, 둘! 하나, 둘!' 처음에는 100개 하는 것도 힘이 들었다. 며칠 다리 근육이 적응이 되었는지 200개, 300개, 서서히 운동량을 늘렸다. 스테퍼에서 내려올 때쯤이면 다리가 후들거렸다. 딴딴해진 다리를 만지면 괜히 뿌듯했다. 하지만, 허리 근육은 생각처럼 쉽게 붙지 않았다. 그동안 얼마나 방치했던 것인지. '찰떡'인지, '마쉬맬로우'인지, 어린아이의 몸처럼 말랑말랑했다. 운동 직후에는 제법 탄탄해지는 느낌이 들지만, 몇 시간 또 흐트러진 자세로 앉아 있거나 누워 있으면 다시 긴장했던 근육들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스테퍼에 '쭉쭉' 올라가는 숫자처럼, 척추를 둘러싼 근육도 늘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운동을 했다고, 나는 '근육 무임승차'를 바랐다. 하지만 몸처럼 정직한 건 없었다. 귀찮음을 이겨내고 땀을 흘리는 만큼 허리 근육은 강해졌고, 내가 편한 만큼 덩달아 느슨해졌다. 체중계에 올라가면 몸은 보란 듯이 증명했다. 운동을 열심히 한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의 체지방량, 근육량, 뼈 무게, 그리고 신체나이까지 숫자가 말해주었다.
오늘은 과제를 한다고 다섯 시간을 넘게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수업시간까지 합치면 8시간이구나. 다리는 퉁퉁 붓고, 허리도 쑤시는 것 같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일어나기로 다짐했는데, 그걸 또 지키지 못했다. 고생하는 내 척추에게 미안해서 평소보다 10분 더 운동해야겠다.
마침내 이틀 뒤면 자가격리가 끝이 난다.
이게 대체 뭐라고, 이렇게 설레는 거지.
속박되었다 풀려나는 기분을 조금이라도 체험했던 시간.
집 밖으로 마음껏 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한 삶이구나!
(2020년 11월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