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때알 Sep 19. 2021

'땡땡땡' 건널목에서…

집에서 학교 출석을 하고

집에서 밥을 먹고,

집에서 차를 마신다.


누구나 그렇듯,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의 9할은 넘은 삶이 수개월 째 계속되고 있다. 한국보다 1시간 정도 해가 빨리 지는 이곳의 겨울은 유난히 낮이 짧다. 저녁 7시 45분이 되어 끝난 강의를 정리하고 창밖을 내다본다. 옆집 남자가 빨래를 걷고 있다.

"Hi!"

"Hi!"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발아래 거리를 내려다본다.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터벅터벅 걸음마다 버거웠던 하루의 무게가 느껴진다. 집 근처 학원 건물 아래에는 서너 명의 아이들이 서 있다. 다들 집을 향하는 시각, 아이들은 집을 나와 학원에 있다. 좀 더 멀리 내려다보니 '안경점' 광고판이 깜박인다. 등이 수명을 다하는 건지, '파르르' 떠는 잎처럼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 마치 크리스마스 조명처럼.


한참을 내다보고 있으니 '으스스' 몸이 떨린다. 아무리 영상 기온이라 하지만, 도쿄의 12월도 겨울은 겨울이다. 문을 닫고 책상 앞에 앉아 보지만, 웬일인지 집중하기 어렵다. 마무리해야 할 과제도 있지만 오늘따라 첫 문장을 쓰는 게 이토록 더딜까. 안 되겠다. 가벼운 점퍼 하나를 꺼내 입고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선다.


여름에는 수업을 마친 후에도 한 시간 정도는 빛이 남아 있었다. 뜨거운 뙤약볕도 없고 산책하기에 알맞은날씨였다. 헌데, 지금은 가로등 불빛, 상가의 조명, 주택가의 빛에 의지해 걸어야 한다.


언젠가 산책하는 풍경을 올린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보고 누군가 물었다. 볼 것도 없는 컴컴한 길을 뭐하러 걷느냐고. 뭐 볼 게 있어야 재밌지 않냐고. 난 "눈이 어지럽지 않아서 좋아요."라고 대답했다. 다양한 빛과 색이 만들어낸 화려한 낮의 풍경과 달리 밤은 무채색이다. 물론 낮 못지않게 현란한 인공조명을 만날 때도 있지만. 오롯이 나의 귀로 세상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땡땡땡"

전차가 가까워져 오는지 건널목에서 소리가 들린다. 철길 건너편에는 작은 차 서너 대가 줄지어 멈춰 섰다. 건널목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말없이 휴대폰을 보거나, 발 밑을 내려다보고 있다.


지하도로나 고가도로를 설치해서 철길과 도로가 직접 만나지 않도록 하고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에서는 쉽게 도로와 만나는 철길을 볼 수 있다. 서울에도 여전히 철길 건널목이 남아있는 곳이 있다. 서소문 건널목은 일터와 비교적 가까워 이따금 지날 때가 많았는데, 발을 디딜 때마다 과거를 걷는 기분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경의선 열차가 지나는 서소문 역을 지었고 후에 서소문역은 철거됐지만 현재까지도 철도가 지나는 곳이다. 서울역에서 문산역을 지나 도라산역까지 이어지는데, 본래는 신의주까지 이어진 철도였다.


누군가에겐 가난하고 외로웠던 추억을 떠올리는 소리일 테고, 또 누군가에겐 그리운 엄마가 밥을 짓고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풍경을 떠올리겠지. 사람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매일 듣는 이 소리를 들으며 무엇을 떠올릴까. 우리도 머지않아 이 '땡땡땡' 소리를 많이 그리워하겠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특급 열차와 급행열차가 나란히 들어온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이들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마스크를 쓴 탓도 있지만 정면을 응시하고 걷는 사람이 드문 탓인 듯하다. 집에서 나와 지금까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앞을 바로 바라보며 걷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씩씩하게 걷는 나를 '힐끔' 쳐다보는 시선을 오늘도 몇 번이나 느꼈다. 아니면 내 몰골이 그렇게 우스운가. 풉!


허리가 아픈 뒤로 반 강제적으로 꼿꼿한 자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나는 산책을 할 때도 의식적으로 어깨와 가슴을 편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남편은 "허리~잇!"라며 상기시킨다. 졸다 선생님 호통에 놀란 아이처럼 깜짝 놀라 구부정해지던 허리를 다시 곧추 세운다. 종종걸음으로 길에서도 다른 사람과 몸이 부딪치지 않으려 애쓰는 일본인들이 보기에 전봇대처럼 반듯하게 서서 걷는 내가 눈에 띌 것 같기도 하다.


20여분 쯤 걸었을까. 역 근처 파출소를 지나, 치과를 지나, 그리고 도서관을 지나 한참 걷는다. 걷다 보니 조금 쌀쌀하게 느껴졌던 7도의 바람은 오히려 시원하다. 그런데 하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일기예보에 비 소식은 없지만, 먹구름이 무섭게 몰려오고 있다. 조금 더 걷고 싶지만, 오늘 산책은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마트에 들러 우유 한 팩이나 사서 들어가자고 남편의 손을 잡고 언덕길을 오른다.

▲ 겨울에는 5시만 되어도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사진은 지난 해 12월 4시 10분에 촬영한 것.
▲ 공원 산책길로 가려면 지나야 하는 집 근처의 건널목
▲ 건널목 ‘땡땡땡’ 소리, 곧 그리워지게 될 소리 중 하나가 되겠지.


[본문의 인용 부분 기사 참고]


매거진의 이전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