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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알 Oct 05. 2021

"잔소리지만 괜찮아!"

신주쿠에서 시부야로 평일 한낮의 산보

「終点の西武新宿駅に到着致しました」
"종점 세이부신주쿠역에 도착했습니다."


 긴급사태가 해제된 이후 오랜만에 집을 나선다. 세이부신주쿠역에서 내려 신주쿠역을 향해 이동하는 중이다. 길을 따라 늘어선 가게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마음 놓고 술을 팔 수 있게 돼서일까! 가게마다 제법 손님이 차 있다. 누구를 만나는 일을 삼가고 조심했던 긴 시간에서 해방된 기분인 걸까! 저마다 상기된 얼굴로 잔을 부딪치고 웃으며 떠들고 있다.


 파칭코와 전자제품 상가를 지난다. 세기말의 테크노 같은 요란한 멜로디가 새어 나온다. 한 사람이 파칭코 안으로 들어간다. 자동 출입문이 열리고 내부를 채우고 있던 소음이 한꺼번에 '' 쏟아져 나온다. 조금 전과는 다른 데시벨의 소리이다. '마스크는 제대로 하고 있나?' 파칭코 안을 힐끔 쳐다본다. 촘촘하게 놓인 기계가 죽 늘어서 있다. ‘번쩍번쩍’ 화면 앞에는 거북이들이 나란히 앉아있다. 긴장한 눈으로 두 손을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다행히 마스크는 착용하고 있다.


 서둘러 블록을 빠져나간다. 사람이 많은 곳은 본능적으로 피하게 된다. 이곳 뉴스에서는 연일 코로나 감염자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고 보도한다. 며칠 전 연락한 지인은 "역시 일본!" 하며 자국의 방역에 대해 뿌듯해했다. 폭발적인 감염 속도에 비교할 때 나아진 상태라는 걸 왜 모를까. 너무 큰 숫자를 경험했던 탓인지 세 자리 숫자에 안심하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온 '쫄보'는 여전히 사람이 많은 곳이 싫다.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피하며 인파를 뚫고 나간다.


'퉁당퉁당'
'끼이익'
'쉬익쉬익'
'취이취이'
'삐이익~삐이익'
'깨갱깨갱깨갱'
'탕탕탕탕탕'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부터 잘게 쪼개지는 소리까지 풍성한 화음이 들린다. 몇 년 전부터 이 일대의 소음 담당이었던 공사장이다. 독특한 외관의 호텔 건물은 서서히 공사가 마무리되어 가는 듯하다. 이 건물은 모양이 특이한데, 겨울의 왕국 엘사가 사는 것처럼 건물 상부로 갈수록 얼음 기둥 같은 구조물이 외벽을 둘러싸고 있다. 공사현장 주변으로 구분해 놓은 인도를 따라 걷는다. 공사현장의 다양한 소리 가운데 선명하게 들리는 것 하나.


 "참~시만 기다려주세요."
「少々お待ちください」


 동글동글하고 하얀 안전모를 쓰고, 잿빛 작업복을 위아래로 입은 외국인 노동자의 목소리이다. 안전 깃발을 들고 지나가는 행인의 이동을 안내하는 중이다.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흐르지만, 아끼는 녀석 하나는 자신을 '외노자'라고 부른다. 외국에서 살고 있는 노동자의 줄임말이라 한다.) 이곳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이 한 마디를 외쳤을까! 짙은 쌍꺼풀 위로 먼지가 쌓여 있다. 그의 높고 큰 목소리에서 공사장의 뿌연 공기와 거친 숨이 느껴진다.


 시끄러운 블록을 지나니  길이 나온다. 가로수와 건물에 가려졌던 하늘이  나타났다. "세상에!" 이렇게 하얀 구름은 오랜만이다. 건물  개를 덮고도 남을 만큼  흰구름이  있다.  위는 바람이 센지 몽글몽글한 덩어리들이 눈에 띄게 흘러가고 있다. '부아아아앙' 오늘따라 비행기가 유난히 낮게 나는  같다. 새총을 당기면 맞출  있을까! 지상 가까이로 날아가는 비행기가  ,  . 걷는 동안 벌써  대째다. 선명한 하늘을 올려다보니 금세 눈이 침침하다. 눈을 깜박거리며  손을  이마 위에 댄다. 작은 그늘에 의지해 햇살에 혼이  눈을 달랜다.


10월의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는 요란하지만, 근사하다.




 10월의 첫 번째 월요일의 한낮 풍경을 눈에 담으며 계속 걷는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재즈를 틀어놓은 오래된 카페 앞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다. 시커먼 가방을 메고 자전거 페달을 밟는 '(Uber Eats 배달원)'들이 경쟁하듯 지나간다. 길 건너 맨션의 테라스에는 빨래가 춤을 춘다. 고슬고슬한 바람은 빨래하기에 최고의 날씨임에 틀림없다. 나 역시 아침 6시부터 세탁기를 돌리지 않았던가.


 아직은 단풍이 들지 않은 초록잎의 은행나무 밑에는 물크덩한 열매가 나뒹굴고 있다. 마스크를 쓴 덕분인지, 고약한 냄새는 나지 않는다. 곧 광화문 일대는 은행 폭탄을 피해 '깡충깡충' 뛰어다니겠군! 나는 '또깍또깍' 힐을 신고 안전한 곳을 찾아 종종걸음 하는 이들을 '가을 토끼'라고 불렀다. 훗! 애정 하는 토끼들은 잘 지내고 있는지, 문득 몇 얼굴이 떠오른다.


 '부우웅' 휴대폰 알람이 뜬다. "벌써 5 천보를 걸으셨네요!" 매일 잔소리를 하는 걷기 어플이다.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수시로 말을 건다.

 

"어제는 이만큼 걸었어요."
"당신의 목표를 잊지 않으셨죠?"
"축하합니다. 만보가 넘었어요."

 

 피곤하니 오늘은 쉬어야지 생각했다가도, 이 작은 몇 마디에 일어나 어느새 걷고 있다. 지난 기록을 보며 뿌듯해하고, 어제보다 더 걷지 못한 오늘은 죄책감도 느낀다. 어쩌다 이 녀석 말을 잘 듣게 된 걸까.

 



 벌써 여기까지 왔나! 아름드리나무들이 빽빽하게 모여있는 숲이 보인다. 메이지신궁(明治神宮)이다. 깜빡이는 초록색 불 앞에 멈춰 숲을 바라본다. 울창한 숲, 어느 계절에 보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공간이다. '까악까악' 까마귀 한 마리가 신호등 옆 인도에 내려앉는다. 소리가 얼마나 큰지, 사람들이 일제히 녀석을 올려다본다. 한껏 시선만 모으더니 '푸드덕' 미련 없이 날아간다. 참 시크한 녀석이다.


 엄마가 운전하는 자전거에 앉아 생글생글 웃는 아이가 지나간다.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난 것들일까! 덴샤가 지나가는 철길 밑으로 만들어진 다리 옆에는 전화 통화하는 남성이 있다. 무슨 사과할 일이 그리 많은지 슬픈 얼굴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라며 고개를 몇 번이나 숙인다. 한낮 기온이 30도까지 오른 탓에 교복을 입은 학생 둘이 마스크를 턱에 걸은 채 걸어온다. 마주오는 이들의 시선을 의식한 건지 턱에 있는 마스크를 손으로 당겨 입과 코를 가린다. 축 처진 책가방만큼 늘어진 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드디어 도착한 목적지. 4층 건물의 옥상 정원부터 올라간다. 지난번에 보았던 장미는 꽃잎을 떨구었고, 이름 모를 나무들은 더욱 무성해져 있다. 어디선가 은은한 박하 향이 난다. 고개를 돌아보니 연보랏빛의 작은 꽃을 틔운 박하가 네모 화분에 빼곡하다. 작은 바람이 불기만 해도 코끝을 간질이는 박하 향기에 '음~' 소리가 절로 나온다.


"벌써 8 천보를 걸으셨군요!"


요요요 똘똘한 녀석!

기분 좋게 본격적인 미팅을 시작한다.  


▲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아직은 반소매 차림도 많이 보인다.
▲ 울창한 숲길은 언제 와도 좋다.
▲ 카페 앞에서 하품하던 고양이는 눈치가 빨라 금세 사라졌다.
▲ 총 10,443보를 걸었다. '높은 활동'이라는 말을 들으면 하루가 이토록 뿌듯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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