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한테 왜 이래!
일본 정부는 오늘…
요즘 최대의 관심사는 일본이다. 매일 기사를 검색하고 주한일본대사관과 외무성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는 것은 하루의 중요한 일 중 하나이다. 이런 생활이 벌써 8개월째 들어섰다.
9월 23일. 드디어 반가운 뉴스가 떴다. 10월 초부터 관광객을 제외한 ‘중장기 체류자의 입국을 대부분 허용할 방침’이라는 내용이었다. 일본 정부 관계자의 말을 빌려,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 언론의 보도가 이어졌다. 반가워 눈물이 절로 났다.
서서히 문을 여는구나!
사실, 일본 정부는 8월부터 재류자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일본 재입국을 허용해 왔다.
신규 비자 소지자인 나는 재입국이 아닌 신규 입국자로 분류되었기에 8월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차츰차츰 입국을 허용하는 대상이 늘어나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일! 나에게도 곧 좋은 소식이 들릴 거라는 이전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커진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여름은 good news를 전하지 않은 채 무심하게 지나갔다. 방학 때 잠시 한국에 왔다가 일본에 입국하지 못하고 국내에 머물면서 애태우던 유학생들은 하나 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유학생처럼 일본에 꼭 입국해야 하는 사람들은 들어간 것 같으니, 웬만하면 일본에 갈 생각은 하지 말자. 코로나 때문에 이 난리인데, 굳이 일본에 가야겠어? <No Japan>을 해도 모자랄 판에!”
인터넷 댓글이 눈에 띄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말이었다. “나 역시 유학생이고, 현지 교육기관의 재학생이니, 꼭 입국해야 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사능에 지진에 이젠 코로나까지 문제 투성이인 나라에 굳이 왜 가려고 다들 이 난리인지 모르겠다.”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에게 나의 상황을 설득시키고 싶지 않았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저 나처럼 올해 신규로 비자를 취득한 자에 대한 '입국 허가 조치'를 하루빨리 발표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은 없고, 애가 탔다.
회사를 떠난 지가 언제인데, 왜 아직도 한국에 있냐며 묻는 이들에게 일일이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일본이 입국 금지 조치를 내린 것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남들은 본인의 관심사가 아닌 뉴스에는 그렇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나처럼 간절히 찾아보는 사람들이야 일본 입국 관련 이슈들이 큰 소식 거리로 다가오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관심하거나 속사정은 모른 채 일본에 가려는 이유만으로 ‘개념 없는 사람’ 취급을 한다.
9월 중순도 훌쩍 지났지만 기다리는 소식은 없어 매일 애가 타던 터라, 대사관 홈페이지에 올라온 알림 글을 어느 때보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3월 8일 비자 효력 정지, 그리고 4월 OO일 우리나라를 일본 입국 금지 대상 국가로 지정, 그로부터 6개월이 흘렀다. 다행히 나는 2월에 비자를 받아 소지하고 있었고, 아직 비자의 유효기간도 몇 개월 남아 있는 터라 입국 제한만 풀리면 바로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기사를 접한 며칠 후 월요일(9월 28일) 대사관에도 관련 내용을 문의했다.
"기사 내용에 대해서는 저희들도 모니터링하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국으로부터 아직 구체적인 지침을 전달받지 않은 상태입니다. 10월부터 입국을 재개한다고 했으니, 그리 오래가진 않을 것 같습니다. 유효한 비자를 소지하고 있는 경우라면, 다시 비자를 받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신규 입국과 관련하여 내용을 전달받으면 대사관 홈페이지에 바로 공지할 예정입니다. 답답하시겠지만, 매일 홈페이지를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긴 내용을 정중하고 친절하게 안내하는 직원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무엇보다 비자와 관련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으니, 집 정리며, 코로나음 성판 성 확인서며, 다른 것들을 차근차근 준비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났다. 어느새 달력도 한 장을 넘기고 10월의 첫째 날 아침이었다. 오전 수업이 있어 세수를 하고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요란하게 휴대폰 진동이 계속 울렸다. 카카오톡 알림이었다.
올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발이 묶여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비슷한 처지의 여성 넷이 나누는 카카오톡 채팅방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이 방에서 정보를 나누고 서로에게 의지해 왔다. 뭔가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건가? 설레는 마음으로 휴대폰을 열어보니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홈페이지의 게시물이 링크되어 있었다. 드디어 공지가 난 것이다!
기사를 통해 10월부터 장기체류자의 입국이 허용된다는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술술 읽어 내려갔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정복하지 못한 지금, 일본에서의 확진자 역시 적지 않은 숫자 인터라 쉽게 입국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몇 가지 조건을 내걸겠지만, 재입국자들에게 요청하는 수준의 서류를 요구할 것이라는 것도.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예상치 못한 것들이 [참고사항]에 굵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참고사항】
○ 이미 대사관에 사증을 신청한 분에 대해서도, 10월 1일부터의 새로운 조치에 따라 받아들이는 기업 / 단체가 작성한 ‘서약서’의 제출이 필요합니다....(중략).... 또한 일본 정부에 의한 사증 제한 조치(3월 8일) 이전에 사증을 교부받았으나, 사용하지 않은 경우에는 사증의 유효기간에 관계없이 새롭게 사증을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근데 이게 뭐야.
황당했다. PCR 검사 확인서(covid-19 음성임을 증명하는 확인서로 일본 입국 시점으로부터 72시간 이내에 발급받아야 유효)만 준비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던 나에게, 또다시 비자를 발급받으라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솔직히 화가 났다. 비자의 효력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입국 금지조치로 인해 '효력이 발생하지 않고 있을 뿐'인데, 비자를 새로 받으라니. 지금껏 참아왔던 인내심이 단번에 무너진 건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노여움도 잠시. 어서 준비해서 비자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번뜩 스쳤다.
그래, 필요한 서류 준비해서
다시 신청하면 되지.
[관련 행정 증명서 발급받기]
세계에서 으뜸가는 전자정부 서비스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서류 떼는 것쯤이나 '식은 죽 먹기'니까. 주민등록등본, 재정보증서, 입학허가증(유학 목적으로 학생 비자 취득이 목적이니까), 은행 잔고증명서, 보험료 납입확인서 등등 필요한 항목을 적었다.
먼저, 컴퓨터를 켜고 '정부24'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우선은 인터넷으로 발행할 수 있는 서류들을 발급하기 위해서였다. 팝업 창이 떴다. 맙소사! 한가위 연휴 기간에 대대적인 시스템 유지보수 작업을 한다는 공지였다. 인터넷을 통한 민원서류 발급 서비스가 정지되는 것은 물론이고, 전국 곳곳에 설치된 무인민원발급기의 모든 서비스 역시 중단된다는 것이었다. 서비스 중단은 은 10월 4일 밤 12시까지. 남의 도움 없이 준비할 수 있는 서류라도 미리 준비하려 했지만, 뜻처럼 쉽지 않았다. 5일 아침이 되어야만 비자 신청을 위한 최소한의 서류들을 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서약서와 재류자격인정 증명서]
그럼 다른 걸 준비하자.
메모장의 두 번째 줄로 넘어갔다.
이번에 발표한 조치에 따르면, 이전에는 비자 신청 시 요구한 적 없었던 항목이 두 가지 추가되었다.
첫 번째는 '서약서'였다. 이번에 완화된 입국조치는 비자를 신청하는 사람에 대한 방역조치를 확약할 수 있는 기업이나 단체가 있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해당 기업이나 단체로부터 "이 사람에 대해 어떠한 조치를 하겠다. 일본 정부의 방역 수칙 등을 따르겠다." 등을 내용으로 하는 '서약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다음은 비자 신청 시 필요한 '재류자격인정 증명서(COE)'에 관한 것이다. 일본의 비자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신청자의 재류자격을 인정한다는 증명서를 사전에 발급받아야 한다. 이 증명서를 신청할 때에는 체류 목적이 무엇인지, 체류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등의 내용을 적어야 하는데, 나의 경우 '유학'을 목적으로 지난 2월 취득하였다. 그리고 학교로부터 받은 COE를 가지고 영사관에서 비자를 신청해 2월에 교부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 재류자격인정 증명서를 신청할 당시의 활동 내용대로 이 사람(비자 신청자, 나)이 여전히 입국이 가능하다는 내용을 기재한 문서를 학교 측으로부터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김○○이라는 사람은 여전히 우리 학교에서 유학이 유효한 사람입니다'라고 학교에서 추가로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휴우. 무슨 서류를 이렇게나 많이.
한 숨 한 번 내쉬고 메일을 열었다. 먼저 두 가지 서류에 대해 학교 측에 문의해야 했다. 정중한 말투로, 필요한 내용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늘 머릿속에 생각하며 실천하려 다짐하지만, 나의 일본어 문장은 모국어처럼 늘 만연체로 빠지기 쉽다. 쓴 내용을 몇 번이나 읽어본 뒤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사진 다시 찍기]
이제 뭘 해야 하지?
아차! 사진이 없구나. 비자를 신청할 때에는 6개월 내에 찍은 사진을 신청서에 붙여 제출해야 한다. 2월에 발급받은 비자는 이미 6개월이 지난 상태이고, 당연히 그때 찍었던 '비자용 사진'은 쓸모없는 종이가 되고 말았다. 급하게 사진을 찍느라 종로구청 앞에 있는 사진관에서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의 사진을 억울한 가슴 쓸어내리며 찍었었다. 그런데 달랑 1장을 사용하고 나머지 사진은 활용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봉투 속에서 6개월을 보낸 것이다. 다시 사진을 또 찍어야 한다. 에휴! 비자 신청할 때 빼고는 어디에도 쓸 곳 없는 사이즈의 사진을 다시 또? 한숨 쉴 일이 또 생겼다. 머리를 매만지고 단정한 재킷을 걸쳤다. 사진이라도 찍어 두자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다행히 사는 건물 1층에 사진관 하나가 있다. 종종걸음으로 가게 앞에 섰는데, 이럴 수가! 추석 연휴기간이라 문을 닫는다는 손글씨가 걸려 있었다. 그래, 지금은 몇 년 동안 오지 않는다는 최장 기간의 추석 연휴였다. 아쉽지만 걸음을 돌렸다.
생각해보니, 나의 일상은 일본의 학사일정에 맞춰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내가 있는 곳은 여전히 서울. 일본 사회에 온전히 들어가지 못한 상태이다. 코로나 팬더믹 상황에서도 한가위 연휴를 즐기는 이들로 조금은 들뜬 거리. 하지만 어떤 소득도 없이 방으로 돌아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나는, 이 연휴를 마음껏 즐길 수 없다.
누구라도 붙잡고 속상한 마음 좀 보듬어 달라고 넋두리라도 할까.
몇 개월째 계속되는 확실하지 않고 불투명한 일상. 억지로 힘을 내고 애를 쓰지만, 오늘은 왜인지 그러고 싶지 않다. 늘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마음이 불안해 미리 해놓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를 "일요일이 마감인 세미나 발표 자료는 아직 여유가 있으니 괜찮다"라며 토닥이고 싶은 날이다.
어차피 지금은 할 수 없는 일들.
날이 지나야, 때가 되어야
하나씩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이다.
월요일까지 사흘만 더 기다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