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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알 Sep 12. 2021

네 번째 장례식

외할머니와 꽃

화환이 빼곡히 들어섰다.


2020년 9월 13일, 외할머니의 장례식장의 입구는 사람 대신 꽃으로 넘쳤다.


2007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12월의 그날도 그랬다. 광주의 한 대학병원의 장례식장은 끊임없이 배달되는 화환들을 받아 정리하는 것만으로 벅찼다. 더 이상 들여놓을 곳이 없었다. 결국 화환에 달린 리본만 떼어서 보관하고 배달하시는 분들께 정중히 부탁하여 다시 돌려보냈다.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2020년 9월. 외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다시 그 일이 재현되었다. 이번에도 하얀 국화로 장식된 수많은 화환들이 장례식장 입구부터 죽 늘어서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장례식 방문이 어려운 이들이, 마음을 담아 보낸 화환이 많았던 것 같다. 침묵하며 서 있는 세 다리의 문상객을 정리하는 건 우리 손자들의 몫이었다. 할머니의 자식 8남매는 '엄마'를 잃은 슬픔을 감당하기에도 벅찼다.


까맣고 하얀색으로 단장한 채 침묵하고 있는 꽃 무더기. 차가운 조명이 비추는 장례식장 복도에 새하얀 화환들이 차례로 들어서니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차츰 실감 났다.


1984년 8월, 손에 꼽을 수 있는 몇 개의 기억만 남아있는 할아버지의 장례식


2007년 12월, 돌아가시던 날 아침에도 평소처럼 외할머니의 손톱 발톱을 예쁘게 깎아주시고는 기르시던 화초의 물 주는 법을 몇 번이고 당부하셨다는 외할아버지의 장례식


2017년 11월, 며칠 전 꿈에도 찾아와 울고 있는 내 얼굴을 쓰다듬고 안아 주셨던 세상에서 가장 용감했던 할머니의 장례식


그리고 2020년 9월. 피붙이를 떠나보내는 내 생애 네 번째 맞는 장례식이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인의 영면을 빕니다.

그들이 가리키는 고인은 바로 나의 외할머니. 할머니는 이제 '옛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티 한 점 없이 하얗고 수북하게 꽂혀있는 국화로 장식된 화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꽃송이들 사이로 할머니의 동그란 얼굴이 살포시 떠올랐다. 그리고 꽃을 참 좋아하시던 할머니가 생각났다.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갈동리, 엄마가 태어난 작은 시골마을이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쓰는 커다란 창고 건물이 있다. 새마을 운동의 흔적이 낡은 벽에 남아 있는 그 건물을 지나면 큰 골목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서너 집을 지나면 짙은 초록색의 대문 하나가 보인다. 흙과 나무로 지어진 헛간과 황토방 구들장이 있던 한옥, 장독과 샘이 있고 커다란 이름 모를 나무들이 심어진 너른 앞마당이 있던 집. 외갓집의 풍경이다. 집 옆에 딸린 작은 텃밭에는 상추, 깻잎, 파, 마늘, 콩, 감자, 고구마... 할머니의 손이 닿아 푸성귀들이 늘 자라고 있었다.

  

마당에는 봄이면 새하얀 목련꽃이 피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고, 그 옆에는 이름 모를 연한 분홍빛을 띄는 꽃나무가, 붉은 영산홍, 여름이면 물망초, 봉숭아, 채송화가 마당의 샘과 장독 주변으로 가득 피어 있었다. 손마디가 다 굽도록 고된 농사일을 하면서도, 할머니는 마당 곳곳에 꽃을 심어놓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셨다.


어느 여름 외갓집에 놀러 갔던 날, 이웃에 사는 한 할머니가 오셨다. 마당에 있는 샘에서 나에게 봉숭아꽃을 따서 주는 외할머니에게 그분은 한 소리를 하셨다.


"아이고, 척산 댁은 맨날 기운 없고 아프닥하든디 다 거짓말이구마잉. 기운 없는 사람이 이라고 꽃나무를 가꾼당가? 아이고 많기도 하네. 많기도 해. 아야, 느그 할머니는 기운도 씨다잉!"


뒷짐을 지고 마당을 '빙' 둘러보시던 그분은 외할머니가 정성 들여 기르는 화분 하나에 시선을 멈췄다. 그리고는 난데없이 화초 평을 하기 시작했다.


"요거 하나 비싸 보이 구만! 다른 것들은 다 쓸 데 없어. 성가시기만 하재. 싹 뽑아블랑깨 그라네."


외할머니는 조용히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라믄 못 써. 다 이삐재.
시상에 안 이삔 꽃이 어딨당가!


▲ '좋은 날' 이라니. 외갓집 마을 입구의 벽화에도 눈물이 났다.
▲ 외갓집 동네의 공동 창고는 이제 사유지가 되었다.
▲ 할머니는 그렇게 오고 싶어하시던 집에 이제서야 돌아오셨다.


어느 봄, 광주에 있는 요양원에 할머니를 뵈러 갔었다. 날씨가 좋아 바깥바람 좀 쐬자며 휠체어에 할머니를 모시고 밖으로 나왔다. 요양원 마당에는 철쭉꽃이 가득 피어있었는데 할머니는 아이처럼 꽃을 보며 좋아하셨다.


"이건 하얀 철쭉, 이건 빨간 철쭉... 곱다. 참말로 곱다!"

"꽃보다 할머니가 더 예쁜데?"

"뭐시 이빼야. 다 늙어서..."


외손녀의 말에 할머니는 부끄러워하시며 손사래를 치셨다. 한참 꽃구경을 하시더니 봄볕에 눈이 부시다며 웃으셨다. 햇살보다 예쁜 할머니의 미소가 참 좋았다. 할머니가 입고 계신 조끼도 철쭉꽃처럼 알록달록 붉은빛이었다.


그 후, 할머니를 만난 건 2016년 일본으로 떠나기 전 찾아뵌 후로 2년 후였다. 그동안 나는 할머니의 존재를 내 삶의 중심에 두지 못했다. 낯선 곳에서의 삶에 집중하느라 엄마 아빠는 물론 다른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일 조차 소홀했었다. 2년 만의 만남, 죄송한 마음을 안고 여전히 같은 병원의 같은 침대에 머물고 계신 할머니는 찾았다. 병실 문을 열고 마주한 할머니는 이전보다 훨씬 수척했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할머니 저 왔어요. 할머니, 저 애진이예요! 너무 오랜만에 와서 죄송해요."


"누구? 오...냐... 왔냐... 그란디 일본은 왜 가야. 공부를 또 할라고?"


할머니의 반응에 당황했다. 할머니는 내가 일본에 가기 전 인사하러 갔을 때의 기억에 머물러 있었다.


"아니, 할머니 공부 다 하고 왔어요. 일본에 갔다가 돌아왔어요. 가는 게 아니고."


열심히 설명했다. '할머니가 착각했다. 오냐 내 새끼 잘 다녀왔냐?'라고 대답해 주길 기대했던 것일까.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간병인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아이고 외손녀 일본에 간 것도 기억하고! 뭔 일이래요! 오늘은 기운이 나신가 보네. 기억 잘하시네. 잘하셔."


그분의 말에 따르면, 할머니는 최근 기억력이 많이 나빠지셔서 자식들의 이름도 가물가물하고 가까운 몇 년 동안의 일들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인사하러 왔던 2년 전의 일을 기억하셨던 것이다.


먹먹했다. 이게 아닌데... 할머니가 내 얼굴도 만져주시고 잘 갔다 왔냐고 토닥이고, 평소처럼 "니 엄마 고생하지 않게 니가 잘 챙겨라." 했어야 하는데...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간다며 병실 밖으로 나와 결국 엉엉 울고 말았다. 복도에서 보조기구에 의지해 걷기 운동을 하고 있던 옆 방의 다른 할머니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병원에 와서 우는 모습은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걸 알기에 얼른 눈물을 닦았다.


할머니의 운동을 옆에서 돕고 있던 다른 간병인 아주머니께서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티슈 한 장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하며 티슈를 받았다. 화장실에 달려가 코를 풀고 빨개진 얼굴에 찬물을 두들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손을 씻고 나오려는데 화장실 거울의 아래에 화병이 놓여있었다. 알록달록 이름 모를 꽃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옆 화장실 벽에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입니다.'라고 쓰인 글씨가 붙여져 있었다. 할머니가 이곳에 드나들 수 있는 상태만 되어도 이 글을 읽으셨을 텐데. 꽃을 보며, 이 글을 보며, 웃으셨을 텐데. 가슴이 저렸다.




이렇게 하얀 국화꽃 말고, 검은 글씨의 리본이 함께 달려있는 이런 꽃 말고. 할머니 좋아하시는 꽃을 많이 사드릴걸. 눈물이 났다. 꽃이 얼마나 한다고. 꽃 사다 드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라고. 돌아가신 후에 이 많은 꽃들에 둘러싸인 들 무슨 소용이란 말이야.


엄마는 복도에 늘어선 국화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한참을 멍하게 서있던 엄마가 갑자기 소리를 내어 울었다.


"엄마... 예쁜 우리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장례식장 입구 계단으로 들어오는 문상객들의 인기척에 엄마는 얼른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나란히 놓여있는 화환들 뒤로 몸을 숨겼다. 잠시 서 있는가 싶더니 엄마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화환 사이로 엄마의 작은 어깨가 흔들렸다. 검은 상복 치마 위로 엄마의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엄마를 꼭 껴안았다. 장례식장 안, 영정사진 속에서 누구보다 환하게 웃고 계신 할머니의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아가, 느그 엄마 잘 위로해줘라. 울지 마라고 해. 많이 울면 기운 없다. 그만 울라고 해.' 할머니가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사진을 보며 더욱 꼭 엄마를 안았다.


할머니처럼 꽃을 좋아하는 엄마. 엄마가 좋아하는 꽃을, 살아계실 때 더 자주 사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들꽃 한 송이만 보아도 자전거에서 내려서 한참 쳐다보곤 하는 소녀 같은 엄마. 외할머니의 여린 감성을 그대로 닮은 엄마가 그렇게 약해 보이긴 처음이었다. 엄마를 안은 내 손 등 위로 자꾸만 눈물이 떨어졌다.


"화환 배달입니다."

꽃은 자꾸만 들어왔다.

이 많은 꽃을 할머니의 하루와 바꿀 수 있다면…….


▲ 간병인 아주머니께서 가져다 주신 할머니의 유품 한 꾸머리. 누군가 음료수 캔 하나를 그 앞에 두었다.
▲ 할머니를 보내며 우리는 서로의 어깨에 기대야했다.
▲ 생전에 좋아하시던 꽃과 함께 13년 만에 할아버지의 곁으로 가신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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