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꽃밭일까
애늙은이처럼 <교복을 벗고>가 뭐야!
어려서부터 보이밴드나 아이돌 가수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지금도 물론이다. 이런 내가 서른이 다 되어 뒤늦게 좋아하게 된 사람이 있다. 바로 SG워너비로 잘 알려진 김진호 가수이다.
그룹 활동을 했었지만, 한때 그는 홀로 전국을 떠돌며 거리에서 노래를 했다. 제대로 갖추어진 무대도 없이 엠프 하나 놓고 길 위에 섰다. 평소 공연 한 번 접하기 힘든 곳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노래를 선물하는 게 행복하다고 했다. 그 마음이 참 기특하고 예뻤다. 오늘 그의 노래를 들었다. 제목은 <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왜 꽃밭일까>.
사실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건 2년 전이다.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마지막 지하철에 겨우 올랐다. 열 명도 되지 않은 승객, 지하철 안은 한산 했다. 나만큼 지쳐 보이는 사람들이 저마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뛰어오느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휴대폰을 꺼냈다. 한창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던 때라 틈만 나면 영어 단어를 외우고 일본어 뉴스를 읽었다. 아침에 읽다 만 웹페이지를 열던 찰나였다.
나와 한 자리를 사이에 두고 앉은 남성이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까만 슈트를 입은 그는 무릎 위에 놓은 손가방에 손을 얹고 한 손으로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하얀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목소리가 제법 컸던 걸까. 아니면 모두가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숨을 죽인 걸까. 낮고 굵은 목소리가 지하철 안에 퍼졌다.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엷은 미소를 지으며 때 지하철 안 깜짝 버스킹의 관객이 되었다. 눈이 마주치면 민망해할까 봐 모른 척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귀는 이미 멜로디와 가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뭐지? 결국 노래가 멈췄다.
처음이었다. tv나 영화 속 장면도 아닌데, 중년의 사내가 노래를 부르며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조금 전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의 대화. "밥은 먹었니? 아픈 데는 없니? 공부는 잘 돼?" 몇 마디의 이야기를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 보이스톡 통화시간 3분 5초. 엄마와의 시간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엄마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눈이 갔다. 언제 바뀌었는지 '프로필 업데이트' 기록을 알리는 작은 동그라미가 눈에 들어왔다. 분홍과 보라의 중간쯤 되어 보이는 '꽃범의 꼬리'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비를 맞은 건지, 물을 준 뒤인 건지 잎과 꽃은 촉촉했다. "역시 우리 엄마!" 프로필 사진을 한 장, 한 장을 넘겨보았다. 스물여덟 장의 사진은 온통 꽃과 나무였다.
금잔화, 송엽국, 코스모스, 노란 나리속(백합), 견 접시꽃, 금영화(캘리포니아 양귀비), 수레국화(물수레국화), 백합, 금낭화, 할미꽃, 탁구공만 한 사과, 채송화, 매화, 금계국, 수국, 산철쭉(개꽃), 팬지(삼색제비꽃), 하얀 배꽃. 그리고 눈에는 익숙하지만 이름 모를 식물들.
다른 사람들은 손자 손녀 사진을 올리던데, 엄마의 프로필은 온통 식물이었다. ‘누가 보면 자식, 손주도 없는 사람인 줄 알겠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들보다 손주가 많은 울 엄마에게 누구 하나 골라 대문사진으로 거는 것도 꽤나 고민이겠구나!
“어머! 벌써 철쭉이 폈네.”
평소에는 존재감 없이 가만히 있다가 꽃이 피면 단연 화단에서 '으뜸'이 되는 철쭉나무였다. 언제 이렇게 큰 거야! 나에게도 익숙한 꽃이 반가웠다. 흐드러지게 핀 꽃 사이사이로 작은 잎이 듬성듬성 보였다.
1994년, 중학생이 되었고 우리 집은 오래된 한옥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쳤다. 아랫채 윗채, 사랑채까지 한옥이 있던 마당의 풍경은 사라지고 낯선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네모난 집 하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엄마는 생경해진 마당 한쪽에 화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시장에서 상기된 얼굴로 묘목 하나를 사들고 돌아왔다. 콧노래를 부르며 화단에 묘목을 심던 엄마는 말했다. “이 나무 알지? 철쭉! 여기서 엄청 이쁜 꽃이 필 거야?” 무슨 색의 꽃이 필까. 흰색? 핑크색? 자주색? 꽃이 피기만 기다리며 물을 주는 엄마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다음 해, 철쭉나무는 분홍보다는 짙고 자주보다는 옅은 선명하고 화려한 꽃을 가득 피웠다.
엄마는 꽃을 참 좋아한다. 시들어서 죽어가는 화분도 엄마의 손을 거치면 다시 생기가 돈다. 겨우 두 줄기 남은 난도 살아났고, 빼빼 말라 가시만 무성하던 선인장도, 흙에 곰팡이까지 핀 제라늄은 숲을 이루더니 빨간 꽃을 피웠다. 엄마는 마법사 같았다.
엄마는 시들어가는 꽃도 생기 넘치는 튼튼한 꽃도 빠짐없이 돌봤다. 마른 잎은 떼어내고 진딧물이 있으면 약을 뿌리고, 화분에 있는 식물들은 때마다 분갈이를 했다. 매일 같이 물을 주고, 비료를 주고, 또 잡초를 뽑고 가지를 치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화초 기르는 게 엄마의 취미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그런데 스물여덟 장의 사진을 차례차례 넘기는 동안, 그동안 무심했던 엄마의 지난 시간이 함께 떠올랐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 꼬맹이였을 때, 마루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며 노래를 부를 때, 구구단을 외우고 처음 월말고사를 보던 초등학생이었을 때, 태어나 처음 입어보는 교복이 너무 좋아 마당에서 뱅글뱅글 돌며 뛰어다녔을 때에도 엄마의 화단에는 늘 꽃이 있었고 내 키 보다 큰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늘 무성했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엄마에게는 쉽지 않은 날들이었다. 엄마는 늘 지쳐 있었고, 야위었고, 늘 약을 먹었다.
아파서 몸을 움직이기 어려운데도 화초 돌보는 일을 내려놓지 않았던 엄마. 꽃은 엄마 자신이었다.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가족이었다. 그래서 작은 화초가 튼튼하게 자라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엄마는 손을 내려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9월, 엄마의 화단에는 가을꽃이 피기 시작했다. 산들이 열매는 맺는 계절, 엄마의 작은 공간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꽃범의 꼬리가 사랑스럽게 온 몸을 흔들고, 탁구공만 했던 풋사과도 자라서 꼬맹이들을 기다리고 있겠지! 그리고 엄마는 오늘도 다섯 자식을 위해 새벽기도를 하고, 또 꽃에 물을 주었을 테지. 예쁜 당신의 꽃밭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스마트폰으로 사진도 찍으며…….
<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왜 꽃밭일까>
- 노래 김진호
여행을 가는 게 옷 한 벌 사는 게
어색해진 사람
바삐 지내는 게 걱정을 하는 게
당연해진 사람
한 번이라도 마음 편히 떠나보는 게
어려운 일이 돼버린 사람
동네 담벼락 피어있는 꽃들을 보면
아직도 걸음 멈추는 사람
엄마의 사진엔 꽃밭이 있어
꽃밭 한가운데 엄마가 있어
그녀의 주변엔 꽃밭이 있어
아름답게 자란 꽃밭이 있어
티브이를 켜고 잠이 들어버리는 일이
어느새 익숙해진 한 사람
티브이 속에서 나오는 수많은 얘기에
혼자서 울고 웃는 한 사람
엄마의 사진엔 꽃밭이 있어
꽃밭 한가운데 엄마가 있어
그녀의 주변엔 꽃밭이 있어
아름답게 자란 꽃밭이 있어
초록빛 머금은 새싹이었지
붉은빛 머금은 꽃송이였지
나를 찾던 벌과 사랑을 했지
그 추억 그리워 꽃밭에 있지
나는 다시 피어날 수 없지만
나를 찾던 벌도 사라졌지만
나의 사랑 너의 얼굴에 남아
너를 안을 때 난 꽃밭에 있어
가만! 그러고 보니 엄마의 사진은 온통 세로 프레임이다. 가로 사진이 많은 나와는 다른 시선이다. 엄마의 사진 속에는 지나간 계절이 담겨 있다. 보고 싶은 자식의 얼굴을 찍듯,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을 찍듯, 엄마는 그렇게 오늘을 기억하고 있나 보다.
엄마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참 좋다. 따뜻하고 참 곱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