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직구 하다 영혼 제대로 탈탈 털린 썰
애초에 추석연휴가 너무 길었던 게 문제였다.
연휴 중반을 넘긴 어느 날 새벽무렵, 화장실에 가고싶어 눈이 떠졌고 잠시 시간만 확인한다는 걸 결국 쇼핑지옥에 빠지게 되었다. 가장 만만한 zara로 시작해 ssf샵, kreme을 지나 번쩍이는 명품 신상으로 항상 내 눈을 즐겁게 해주는 마이테레사에 접속. 이것저것 신나게 보다가 워워 요즘 내 수입으론 가당치도 않다 겨우 억누르고 의미없는 웹 브라우징을 하던 중
앗. 갖고싶던 아크네 가디건 발견. 헉 갤러리아 가서 매보기만 하고 넘 비싸서 그냥 나왔다가 며칠 동안 눈에 삼삼했던 르메르 범백까지. 이렇게 싸게 판다고? 매장에선 180만원 가방을 첫구매 할인 포함 온갖 쿠폰 다 쓰니 60만원 초반에 구입이 가능하다. 심지어 무배라니. 게다가 갖고싶던 스몰 사이즈에 브라운 컬러가 아닌가.
이 가격이라면 당근으로 팔아도 남는 장사이니 컬러따위 아묻따 우선 사고 보자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곧 품절각이라는 워닝 메시지가 뜬다. 이정도면 하늘이 내게 내려준 쇼핑기회다. 앗 자세히 보니 내가 원하는 보들보들 양가죽은 아니지만 뭐 소가죽에 코팅처리 한 빤딱이 느낌도 아주 짙은 브라운 컬러라면 문제가 안된다. 1/3 가격인거 감안하면 진짜 잘 들겠다. 오케이 결제.
곧이어 아크네 가디건 공략. 진작에 회색 울 가디건을 하나 사고 싶었는데 와아! 맘에 드는 디자인 발견. 모헤어 울 가디건, 그레이 90+라이트 블루 10이 섞인 오묘하고 예쁜 색이다. 처음 본 직구 사이트에서 가장 저렴하게 판매 중이라 먼저 그 사이트가 믿을만 한 곳인지 써치 후 앱 깔고 회원가입을 했다. 아직 구입도 전인데 하이고 눈알이야..이미 두 시간째 옆으로 누운 채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자니 눈이 침침하다.
가디건은 사이즈가 문제다. 숫자와 영어가 섞인 길고 복잡한 품번을 복사해서 포털에 검색을 하기로 했다. 좀 특이한 재질의 옷이라 리뷰가 잘 없다. 딱 하나 어느 패션 블로거의 리뷰 발견, 160대 후반 키에 마른 체형의 블로거는 xs를 선택했다니 나는 s로 가야하나..아크네 가디건은 크게 나온다던데 너무 후줄근한 건 싫다. 그냥 xs로? 이게 뭐라고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xs로 결정. 제발 잘 맞기를. 아니면 옷에 몸을 맞추지 뭐.
내친 김에 자라 앱에 접속, 여기저기 받쳐입을 셔츠와 원피스, 세일하는 구두까지 한가득 결제하고서야 새벽녘 광란의 쇼핑 질주를 멈출 수 있었다. 새벽 3시 언저리에 시작한 인쇼를 아침 7시 반이 되어서야 겨우 끝내고 나니 기존가 대비 백 만원 이상 싸게 산 건 너무 뿌듯했지만 이거 원 직구란게 내 손목과 시력과 영혼을 갈아넣어야 하는구만. 자주는 못할 거 같다.
며칠 뒤 매치스에서 택배가 도착했다. 잔뜩 기대한 채 열어보니 어 약간 이상하다. 분명 다크 브라운이라고 주문한 가방 색깔이 도무지 브라운 같지가 않은 거다. 햇살에 비쳐보니 진한 올리브색 같기도 하다. 혹시나 해서 태그를 보니 떡하니 khaki 라고 적혀있다.
순간 어찌나 실망스럽고 화가 나던지. 어떻게 이런 걸 실수 할 수가 있지? 매치스는 교환도 안되고 반품 후 다시 구입해야 한다. 또 관세가 이미 포함된 가격이라 관세 제외 일부만 환불 후 관세는 소비자가 직접 운서 관세사에게 각종 서류를 제출해야 돌려주는 시스템인 거다. 심지어 반품은 유료임. 아아악 ㅠㅠ 직구 반품이 너무 번거롭고 귀찮아 심지어 두 사이즈가 큰 구두도 밑창 두개 깔아 신는 나란 인간에게 이런 가혹한 상황이 발생 하다니.
가디건은 주문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발송 준비중. 이러다 사기 당하는 건가 싶어 주변 직구 전문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심하게 싸게 파는 제품들은 거의 두 달 정도 기다려야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많이 싼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러다 겨울 다 지나고 내년 봄에나 입겠네. 북슬북슬 털 가디건인데.
믿고 주문한 자라까지 나를 배신했다. 그나마 가장 안전한 기본 셔츠와 원피스, 특가로 나온 키튼힐 구두를 주문했는데 어쩜 얘네 왜이러니. 같은 스몰 사이즈가 어떤 건 너무 작아서 셔츠 단추가 쩍 벌어지고 또 어떤 건 너무 품이 남아 후줄근. 화면에선 쨍한 레드 컬러로 보였던 원피스는 시꺼멓고 탁한 오래 묵은 고추장 같은 색깔이고, 신발은 소재가 라피아였구나. 한겨울에 라피아라니 나 뭔 짓을 한거니. 새벽이라 비몽사몽 제정신이 아니었던 걸로 하자. 결국 모두 반품 결정. 새벽녘 네 시간 이상을 쏟고 체력을 갈아넣었던 쇼핑에서 아무것도 건진 게 없다니 허탈했다.
기력이 많이 딸렸지만 할 건 해야지. 잠시 당근의 유혹에 흔들렸지만 물건 촬영, 업뎃, 거래 과정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질려서 가방은 반품, 아크네 가디건은 기약없이 기다리기로 하고 자라는 깔끔하게 반품처리 되었다. 역시 국내배송이 최고여.
한국 사이트인 줄 착각할 정도로 익숙한 매치스에 당연히 한국어 상담직원이 있을 줄 알았던 건 경기도 오산이었다. (아악..넘 구리지만 한 번 해보고 싶었던 표현임) 두 달 전 한국어 서비스를 종료했다는 설명과 함께 심한 브리티시 액센트를 가진 직원이 상담을 해주었다.
‘우리는 니가 주문 한 컬러의 가방을 제대로 보냈다. 비록 제품 설명에는 브라운이라고 되어 있지만 detail 글씨 옆 작은 +를 클릭해보면 그 설명 중에 khaki-brown 이라고 써있을 거다. 너는 그걸 읽어보지 않은 채 카키 브라운을 샀으며 다른 컬러는 재고가 없고, 우리는 교환 대신 무조건 반품 후 재주문 원칙이다.‘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그러니까 내가 잘못했단 얘긴데 너무 열받기도 하고 영어도 서툴러서 충분히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한 채 어버버 꽥꽥 거리다 끊었다.
이대로 당할 순 없단 생각에 papago 번역에 의지해 분노로 가득찬 장문의 이메일을 써서 보냈다. 며칠의 기다림 끝에 복붙 자동 답장이 심히 의심되는 메시지를 받았다. 너가 언해피 해서 우리는 되게 유감이긴 한데 우리는 제대로 보냈다. 싫음 환불해. 끝.
몇 주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이 글을 쓰는 지금, 매치스 부분환불은 완료 되었고 받지 못한 관세는 아직 관세사에게 신청 전이며 아직도 오매불망 아크네 스튜디오 가디건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 새벽 이후, 직구 실패로 인해 발생한 모든 뒷수습을 하는 동안에도 일상은 계속되었다. 초라한 실력의 영어로 상대방의 잘못을 증명 하느라 쩔쩔 매다가도 요가 티칭을 하러 가야했고, 파파고의 도움을 받아 장문의 컴플레인 이메일을 쓰다가도 수련 시간이 되어 수업을 들으러 갔다.
내 돈 쓰고 스트레스 받고 시간 낭비하고 이 모든 게 너무 짜증났고, 하루 빨리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는 환불 프로세스가 답답하고 혹시 배송비를 물어야 하는 등의 손해를 볼까 이만저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요가로 인해 그 부정적인 흐름을 반 강제로 끊을 수 있었다. 남들 다 잘만 하는 직구 하나 이 나이 먹도록 제대로 못하는구나 싶은 자괴감도 잠시의 명상과 요가 수련 덕에 그럭저럭 이겨낼 수 있었다.
일상에서 매일 소소하게 직면하는 분노로부터 의 강제적인 off, 내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이런 시간은 꼭 필요하다. 분노의 감정으로 터질 듯 부들거리며 메일을 갈겨 쓰다 버스를 타고 요가원으로 가서 가서 1시간 남짓 명상 수업을 듣고 테라피요가 호흡을 따라 하다 보면 어느새 화는 제어 가능할 정도로 가라 앉았고 내 상황을 한 발짝 떨어져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내가 화를 내도 달라지는 건 없다. 나를 응대하는 상대 직원은 내 적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시간이 걸릴 뿐이지 결국 다 해결이 될 문제다. 극단으로 가지 말자. 여기서 멈추자. 이런 생각과 다짐을 하게 된다.
나는 그저 이 경험에서 교훈을 얻었다 생각하고 가볍게 넘어가면 되는 거다. 오히려 이런 불쾌한 경험이 내 일상을 지배하는 것, 휘둘리는 것은 내가 절대로 바라지 않는 상황이다.
꼭지가 돌기 직전 나의 이성의 끈을 잡아 주는 것이 요가라는 걸 깨닫자 매일 수련의 필요성과 다짐을 더 강하게 하게 되었다. 또 셀프 수련, 유튜브를 보고 집에서 따라하는 형태가 아닌, 사람들과 모여서 한 장소에서 하는 전통적인 수련이 게으르고 의지박약하나 삶의 질서와 균형을 중시하고 매일 더 나은 방향으로의 변화를 꿈꾸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아와 일을 동시에 하면서 매일 요가 스튜디오에 출근도장 찍는 건 참 힘들다. 하지만 전쟁같은 하루하루에 평온한 일상을 사수하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 수련이 체화된 후 어느 시점에선 집에서 혼자만의 수련을 통해서도 내면을 깊이 탐구하고 컨트롤 할 수 있는 요령과 지혜가 생기길 바라본다.
아 그리고 앞의 직구 실패는 아주 드문 케이스란 걸 밝혀둔다. 직구는 230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어렵거나 못할 일도 아니고. 이 글로 인해 직구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거나 피하지 말고 도전해 보시길.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얻어지는 노하우로 스마트하게 쇼핑을 하시고 뿌듯함과 성취감을 덤으로 챙기시길. 나 역시 갖고싶은 겨울 스웨이드 부츠를 사기 위해 다시 한번 직구에 도전하려 한다. 이번엔 제발 별 일 없이 원하는 쇼핑을 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