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버티고 잘 살아냈구나
"친구야... 나 이제 그만 되돌아가려고 준비하고 있어. 30여 년 전 내 선택으로 오게 된 이 땅,
내선택의 책임을 다한 것 같아서 이제 나 고향으로 되돌아가려고......"
지난 12월, 오랜 투병 중이던 남편과의 사별했던 친구가 지난주에 연락이 왔다. 이 이국땅에서의 숙제를 마무리하고 귀향을 준비하고 있다는 친구의 살아온 얘기를 듣고 싶었다.
때 아니게 퍼붇던 캘리의 폭우가 잠시 멈추고 햇볕이 따사하게 내리던 날,
친구와의 점심식사를 위해 1시간 거리를 자동차로 달려가고 있었다.
오랜 가뭄으로 노랗게 타들어만 가던 샌프란시스코 근교의 Highway 280 언덕배기가 겨울비를 마음껏 머금은 푸른 융단으로 쫘악 깔려 있어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오랜 가뭄으로 아우성치며 앞마당의 잔디에 물 주는 일조차도 과도한 벌금으로 메겨지며 절수정책을 펴왔건만 이렇게 상상도 못 한 일들이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다니... 인생은 항상 꿈꾸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항상 불행한 일들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가 보다. 알 수 없는 풍성한 미래가 내일 당장이라도 우리 삶에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던 차에 목적지에 다다랐다.
남편의 마지막 유품들을 정리하고 귀향준비를 하느라 수고한 탓인지 지난여름에 만났을 때보다 수척해 보였다.
"내 인생에 토니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남자를 만날 수 있었을까.
30년 결혼생활동안 말이 안 통한다고 윽박지르거나 손찌검이나 소리를 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그 남자는 항상 나를 존중하고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나의 삶의 가치를 최고로 생각해 주는 최고의 남편이었어."
친구의 눈에는 굵은 이슬이 맺혀 금방이라도 또르르 구를 것만 같았다.
"아들 가족은 잘 지내니?"
"아들과 며느리가 손자 손녀와 더불어 화목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하단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전화해 주고 맛있는 외식도 대접하며 케어해 주는 아들 또한 토니가 남겨준 선물 아니겠어. 착실하고 야무진 며느리를 만나게 되어 아들 가족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 정말 감사해."
"한국으로 귀국하려면 하우스는 어떻게 할 거니?"
"우선은 렌트를 주기로 했어. 부동산 자산정리는 서두르지 않고 차근히 정리하려고 해.
토니가 힘든 투병 중에도 남겨질 나를 위해 VA 연금서류들을 미리 다 정리해 주어 당장은 빈손이 아니니 그 또한 토니가 내게 남겨준 선물이라 생각해."
"넌 참 잘 살아냈구나. 넌 참 견디어 냈구나.
미군출신의 흑인 남편과 아들 데리고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었니?
주위의 편견과 쓸데없는 루머와 각종 차별을 이겨내고 묵묵히 살아온 너의 삶과 성공에 큰 박수를 보낸다.
어떻게 말로다 표현할 수 있겠니?
때로는 고달프고 지칠 때도 있었겠지.
너무나 힘들 때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었겠지.
하지만 레스토랑 서버부터 시작해서 Dental Lab Technician으로 은퇴하기까지는 늘 남편의 따스한 배려와 젠틀한 성품이 늘 너의 시간들을 감싸고 있었구나"
"이제 난 이 땅에서 해야 할 숙제를 다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어 무엇보다 감사해.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그 많던 시집식구들도 이젠 거의 다 돌아가시고 몇 안 남은 토니의 혈육들을 차근히 방문하며 마음을 나누고 있단다. 이젠 모든 것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고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 남아있네."
"축하한다고 해야 할까? 아니야.
숙제를 끝낸 너의 삶의 한 페이지에 '참 잘했어요' 도장 박아주고 싶어.
이제 환갑언저리에 있는 우리에게 지금부터 주어진 시간들은 Grace Period야.
이제 다시 일어나 우리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거야.
아무리 힘들다 해도 우리가 여기 처음 오던 날만큼 힘들을까.
아무리 고달프다 해도 우리가 남의 땅에서 살아온 만큼 고달플까.
친구야!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겁도 내지 말라.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이니까.
네가 치열하게 살아온 만큼 이제부터는 누리며 살아가는 거란다.
살아오느라 내려놓고 있었던 너의 하고픈 소망들을 맘껏 누리며 살아가길 기대해.
이젠 너의 앞길에 꽃길만 펼쳐지길 진심으로 하늘에 기도해.
우리 잘 살아보자! "
20대 후반 새댁일 때 만나 30여 년을 이국땅에 살아내고, 60대를 눈앞에 두고 만난 우리들의 푸념이 참 값진 거여서 감사한 하루다.
60대 이후의 여성의 삶은 누구의 딸도 아닌, 누구의 엄마도 아닌, 누구의 부인도 아닌 그냥 인간 사람인 '나'로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 하늘이 부여해준 시간이 다 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