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새벽향이 참 좋다

울아버지하고 나하고

by Jinnie

동트기 전의 미명에, 모든 것이 잠들어 하늘의 별조차 자취를 감춘 새벽녘에 창문을 여니 신선한 향이 코끝에 살포시 앉는다. 세상이 처음 창조되기 전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너무 조용하고 차분하여 공허하기조차 한 이 순간, 새로 태어난 심장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대할 수 있어서 참 좋다. 세상에 나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이 느낌이 참 좋다. 나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 이 새벽의 신선한 느낌이 참 좋다.


해마다 9월은 내게 좀 특별하다. 7일은 내 삶의 멘토이신 울아버지의 생신날이고, 추석이 지나고 며칠 후 19일은 울아버지의 추모일이기 때문이다.


1989 9 19 화요일, 그날 새벽도 오늘처럼 맑고 고요했었다.

"OO 일어났니? 입고 나오면 어떠칸니?"

여느 때처럼 새벽 4 반쯤에 울아버지는 잔잔한 어조로 방문 앞에서 날 깨워 주셨다. 건너 예배당으로 새벽기도 가시는 아버지를 따라가고 싶어 전날 잠들기 미리 부탁드렸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손을 잡고 맑은 새벽공기를 마시며 걷는 느낌이 좋아서 종종 따라다녔다.


아버지의 기도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먼저 기도를 끝내고 성경을 읽으며 조용히 기다리곤 했었다. 그날따라 아버지의 기도는 절규에 가까운 간절함으로 길게 이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기도를 마치고도 평시와 달리 집으로 곧장 가시지 않고 교회 난간에 앉아 동트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시를 읊조리듯이 말씀을 이어가셨다.


평양에서 수학하다 방학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면 해주 기차역에 마중 나와 계시던 할머니 얘기며, 해방 , 지주이자 감리교 신자이셨던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좌익세력의 추적을 피해 옮겨 다니며 예배드리던 얘기, 통일이 되거나 혹시라도 이북을 방문할 있는 길이 열리면 찾아가 보라는 아버지의 고향 주소까지 세세히 일러주셨다. 그날 아침에.


"기러니까 내가 며칠 전에 말이야, 꿈에 하늘에 있는 금도성 예루살렘을 봤다 이기야. 산모퉁이를 막 돌아가려고 하는데 산등성이에서 번쩍번쩍 황금빛 성이 쫘악 나타나는 기지...

"OO ~~~ OO~~"

"내 이름을 부르는 니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소리가 들리는기야

" 발자국만 띄어보라... 이제 거의 왔다. 그동안 수고했으니 도성에 와서 쉬어보라... 하는 음성이 들리는 기야"


"아이고 울아부지가 또 할아버지 많이 보고 싶으셨나 보네... 꿈에서라도 할아버지 생각한걸 보니..."


"기카고 전에 일러준 대로 황해도 해주시 안악군 000번지. 꼭 기억하고 있시라..."

"내가 이남에 내려와 살면서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인지 아니?"

"고향(故鄕) 수도 없고,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곳이지만 본향(本鄕) 가야 한다는 기야. 우리 모든 가족이 ~같이..."


그해 추석연휴 끝이라 보통의 실향민들이 명절 때마다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듯이 그런 지나가는 감정으로 치부했던 어린 나는 그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날이 아버지와 함께하는 마지막 새벽기도 동행이었음을.


집으로 돌아온 나는 출근준비를 서두르고 아침식사 전에 가족예배를 드렸다. 추석연휴에 내려왔던 언니네 가족과 대학생이었던 동생도 서울로 떠났고 대입 수험생이었던 막냇동생은 일찍 등교한 터라 엄마와 아버지와 셋이서 단출하게 드리는 아침 예배였다.


기도력을 읽고 대표기도를 하시는 아버지의 기도는 또다시 길게 이어졌다. 거의 한 시간가량 계속된 그 기도는 가족과 자녀들에 대한 감사함과 아쉬움과 간절함으로 가득한 유언이 되었다. 결혼한 큰 딸네 가족은 물론이고 아직 미혼인 3남매와 그 아이들이 장차 꾸리게 될 세 아이들의 가족들까지 하나님 앞에 의탁하시는 기도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가장 간절한 마지막 소망은 당신이 이 지상에 살면서 가장 가치 있게 지켜왔던 그 믿음의 원칙이 후손들에게도 대대손손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아니셨을까.


그날 오후,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와 현관에 들어서니 화요 예배에 참석할 준비를 해야 하는 아버지가 일어나지 못하시고 낮잠 삼아 이미 영원한 숙면에 들어 계셨다. 그렇게 아버지와 내게 연결되어 있던 이생에서의 끈이 분리되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재림가족으로서 잠시 잠깐의 이별이 아쉬웠지만 많이 슬프지는 않았다. 곧 다시 만날 테니까.


아버지의 새벽기도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실향민 1세대인 울아버지와 경남 토박이(Native) 엄마가 아무 연고도 없는 전라도 광주땅에서 사업을 일구고 아이들을 낳고 신앙을 지키며 살아오신 분의 생애는 이방인의 자체였다. 3,40년을 타지인으로 남도땅에 살면서 좋은 이웃들을 만나기도 하고 배신과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그러다 또다시 회복하기도 하면서 삶을 꿋꿋이 꾸려 오셨다.


셋째 딸이었던 내가 첫돌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은 정초에 부모님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유난히도 발달이 빠르고 영특했던 둘째 딸아이를 이제 개업한 소아과 의사의 오진에 의해 의료사고로 잃게 되었다. 사업이 한창 번성하던 시기라 보상금을 푼도 받지 않기로 하고 젊은 의사의 미래를 생각하여 실수(?) 덮으셨다.


문제는 소아과가 하필이면 예배당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병원 앞을 지나칠 때마다 끓어오르는 상실감에 울며불며 지나다니곤 하셨다. 그러다 어느 문득 이 세상의 죄인 인간들을 위하여 외아들을 십자가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게 되면서, 아이 잃은 상실감을 하나님께 위로받고 싶어 시작하셨던 것이 아버지의 새벽기도였다. 그날부터 아버지의 새벽기도는 세상을 떠나던 날 새벽까지 25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 후 점차로 구멍 아버지의 가슴에 십자가의 따스한 빛이 채워지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상식을 뛰어넘는 가히 기적 같은 일들이 우리 가족에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로 아이를 잃었던 그해 12월에 아버지와 엄마는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쉰둥이 아들을 자연분만으로 얻게 되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3 , 아버지 쉰일곱에 막내아들을 또 보시게 되었는데 주위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부자관계처럼 특별한 은총이라 하여 화제를 모았다.


그렇게 얻은 아들이 하나는 치과의사로 다른 아들은 신경외과 의대교수로 활동하고 있음을 때마다 울아버지의 새벽기도생활을 떠올리게 된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의 울타리는 좀 특별했다. 집 밖을 나서면 별다른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집안과 집 밖의 음식이나 문화의 차이가 많았고 어머니 아버지의 억양이나 어휘와 바깥사람들의 말씨는 확연히 달랐고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도 많이 달랐다. 더구나 양가의 친인척이 없이 딱 '우리 가족'만 살았기에 더 남달랐던 기억들이다.


그래서였을까. 우리 4남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과 격려를 받으며 자라났고, 우리들 또한 어떻게 하면 나이 드신 부모님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할까를 늘 염두에 두고 성장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4남매의 우애는 좀 더 단단했고 아무리 바깥에서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었다 해도 집안에 들어서면 곧 회복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코스모스의 꽃말은 '질서' '소박함' '평화' '조화'이다.

얼마 전, 대학에서 의학과 신학을 전공하며 의료선교사의 꿈을 준비하고 있는 조카와 만났다. 아이는 한 번도 뵙지 못한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궁금해하였다.

"고모, 할아버지는 어떤 삶을셨나요?"

"할아버지의 ?"

"이런 어록을 남기셨지. 덕을 베풀고 어질게 살아라. 하나님은 어떤 인간도 하찮게 쓸모없게 창조하지 않으셨단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항상 귀하게 대하고 함부로 무시하지 마라.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단다. 작은 일을 성실히 잘해야 큰일도 잘할 수 있단다."

"한마디로 말하면 할아버지는 인자무적의 삶을 사신 그리스도인이시지. 인자무적(仁者無敵)은 어진 자에게는 적이 없다는 뜻이란다. "


울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장례예배에 수많은 이웃들이 몰려와 이구동성으로 '살아있는 예수님', '예수님 같은 장로님'이셨다고 추모해 주셨다. 물론 유족에 대한 인사치레로 들릴 수도 있었겠지만 크리스천으로서 이보다 멋지고 아름다운 호칭이 있을까...


울아버지가 전쟁으로 인해 본토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40 년간 사시면서 얻어낸 삶의 지혜, "적을 만들지 말고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덕을 베풀며 살아가라는 삶의 방식을 후손들에게 남겨주셨다. 후일에 당신의 자녀들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이민생활을 하게 것을 미리 아셨던 것처럼......


낯선 땅에 발디디고 사부작거리며 이민자로 살다 보면

"지금 여기 어디? "

"나는 누구? 여기서 ?

"어질게 산다고, 덕을 베풀며 살겠노라고 살아왔는데...... 왠지 찝찝한 이 느낌은 뭐지?

"내가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걸까?

"과연 나는 방향키를 잘 잡고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가끔씩 남편과 아이들을 제치고 자연인으로서 나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을 순수하게 되돌아볼 때가 있다.


울아버지는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아이를 잃은 단장(斷腸) 고통도 새벽기도로 승화시켜 견뎌내셨던 울아버지처럼 나도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어본다. 삶의 방향키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녀를 허락할 때는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주고 먼저 경험한 삶의 기술을 전수하라는 사명감도 함께 주셨다. 부모님의 가르침은 자녀로서 그저 지나가는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다. 오래도록 기억하고 지켜나가야 하는 추억뭉치들이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잊혀 간다 해도 하나만큼은 울아버지를 기억해야 이유가 있다. 울아버지니까...


덧붙이는 글

요즘은 쉰둥이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에 있지만 50 전에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합니다. 쉰둥이가 60번째 생일을 앞두고 '' 모습을 되돌아보니 울아버지 가르침의 영향이 컸습니다. 부모님은 나에게 세상사는 방법을 일러주라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존재입니다. 여기까지 세월을 살아보니 그래도 부모님의 가르침이 옳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성품과 가르침과 살아오면서 엎어지고 깨지면서 깨달은 것들이 어우러져 오늘의 ''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부모님 특히 아버지와의 추억을 반추(反芻) 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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