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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nie Sep 25. 2023

가끔 남편의 지갑을 점검한다

가진 자의 여유(?)

가끔 남편의 지갑을 점검한다. 지갑 속에 남편명의로 된 ATM카드가 있음에도 현금을 채워주기 위해서다.


사실 남편은 개인용 현금이 크게 필요한 사람은 아니다.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따로 만나는 모임이 많은 것도 아니다. 굳이 현금이 필요하다면 가끔 음료수를 구매하거나 맘에 맞는 친구들과 동네 골프를 즐길 여비가 필요하거나 특별한 날의 세일기간에 본인이 좋아하는 스포츠용품을 구매하는 정도다.

 

그럼에도 현금을 챙겨주는 것은 가족을 위한 가장의 헌신에 대한 보상으로 에너지를 넣어주고 싶기도 하고 친정어머니, 경상도 아지메의 명령(?) 때문이기도 하다.


“얘야, L서방의 호주머니를 늘 채워주거라, 밖에 나가 호주머니가 가벼우면 마음도 가벼워지는 법이란다.”

 

대한민국에서 6,25를 겪고 7,80년대 경제부흥기를 거쳐 IMF를 경험한 어른으로서 현금의 힘과 가치를 일러주시는 인생선배의 찐 조언으로 마음에 와닿는다. 


현금은 현시대의 생활에 꼭 필요한 도구다. 많이 소유할수록 편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남들보다 갖지 못했다고 해서 반드시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조금 불편하게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부동산가치가 높고 많은 자산가들이 대거 몰려 산다고 하는 실리콘 밸리에서 깨닫게 되는 가진 자의 진정한 여유란 무엇일까? 


90년대 초의 실리콘밸리는 40여분 떨어진 샌프란시스코에 비해서 꽤 한적한 시골이었다. 갓 시집온 새댁의 눈에는 모두가 급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한국라이프에 비해 차분하게 자신의 꿈을 키워 나가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모두가 열심히 일하여 일구어 낸 그들의 꿈의 결정체들은 그들의 자랑이었고 가장 안전한 자산이었고 보장된 미래였다. 


2008년 리먼 마커스 서브프라임사태를 지나면서 그들의 자랑과 삶의 여유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고, 그 후 10여 년이 지나 2019년 팬데믹을 거치면서 그들의 자산과 보장된 미래에 당혹감과 초조함마저 스며들었다.


많은 이들이 잡을 잃어야 하는 아픔을 겪었고 오랫동안 운영해 오던 사업을 접어야 하는 고통도 경험했다. 그리고 그들은 거주지를 처분하여 정든 이웃들과 친지들을 뒤로하고 이 도시를 떠나갔다. 


그들이 떠나간 거리는 최신형 자동차들이 넘쳐나고 오래된 건물들은 헐리어 재건축되고 건물 안팎의 리모델링으로 도시는 점점 정갈하고 화려하게 변신해 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도시에 뭔 지 모르는 불안감과 공포(?) 감마저 감돌고 있다. 아침마다 뉴스 1면을 장식하는 각종 자연재해와 갖가지의 사건사고들이 삶의 일상에 체감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산호세 공항 근처의 넓은 공터에 줄 그은 만큼 내 거주지로 삼아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언하우스드 피플(unhoused people)이 있다. 언하우스드피플이란 일정한 잡을 가지고 있으나 거주지를 얻지 못하고, 공터에 차를 세우고 살아가거나 가건물을 짓고 최소한의 살림도구로 숙식을 해결하며, 각 기업체에서 주기적으로 무료 제공하는 간이 세탁소와 간이 샤워장을 이용하여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가끔 남편과 함께 금방 만들어낸 햄버거와 컵라면과 따듯한 물을 들고 그들을 방문하곤 했었다.   

2021년 방문했던 산호세 공항 근처의 unhoused people town

그들도 한때는 블루 칼라 잡이나 화이트 칼라 잡을 가지고 꿈을 키우며 살았던 사람들이다. 자산관리에 실패하여 전재산을 놓치기도 하고 무리한 부동산 투자로 은행에 거주지마저 고스란히 내놓게 되었던 사연도 있다. 자산관리에 실패했다고 해서 모두가 마약이나 도박에 연관되어 있는 케이스는 아니다. 갑자기 불어 다친 경제한파에 무너져 다시 회복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주저앉은 사연들도 많다.  


아예 아무것도 없으니 자산을 지켜내야 한다는 강박감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걱정과 근심도 모두 한꺼번에 없어지더라는 그들의 사연들을 듣고 있자니 참 아이러니다. 소유하고 살아도 그 가진 만큼의 걱정과 염려는 커지더라는 소시민의 하소연에 반해 무소유자들이 오히려 더 안정감을 느낀다니.  


남편은 헐거워진 지갑을 내비치며 한마디 건넨다.

“오늘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햄버거 하나 나눠줄 현금이 내 호주머니에 있었으니 행복한 날이었네, 헤헤” 

실리콘밸리 한 귀퉁이에서 소시민으로 살아가면서 이웃에게 마음을 내어 줄 여유가 아직은 있으니 참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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