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모과나무 아래
모과가 노랗게 익는 10월이었다.
치즈고양이 라미와 동락이가 꽃밭에 잠들어 있는 날이었다.
그들의 앞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뒤늦게 단잠을 깨워 미안한 마음에 자리를 비켜주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도저히 쉬이 눈길을 뗄 수 없어 거푸 뒤를 돌아보며 저린 다리를 이끌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그들에게서 달콤한 휴식을 앗아가는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사랑하는 이 동네는 30년의 시간을 지나온 아파트들이 주를 이룬다. 덕분에 단지마다 커다란 나무들과 낡고 바랜 놀이터와 같은 구식의 것들을 가지고, 지친 이에게 칠이 벗겨지고 뒤틀린 낡은 나무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내주었다. 낡은 콘크리트 속에 무심하게 심겼을 그 나무들이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었을 그 세월 동안 성실하게 자라고, 살아 숨 쉬며 이제는 엉성하지도, 희고 반듯한 벽 앞에 옹색하게 서있지도 않게 되었다. 오히려 그들 속에 아파트가, 그리고 그 속에 우리가 살아가는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듯 보였다. 운 좋게도 우리는 이 유토피아 같은 공(共)간 안에서 고양이라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착실하게 걸어 다니며 작은 풀 하나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쓴 덕분에 나는 모과 만한 너를 만날 수 있었다.
민들레 홀씨 같이 삐죽거리는, 흙바닥에 뒹군 건지 노랑에 회색끼가 도는 색의 털을 가진 너는 회색 자동차와 회색 건물 사이 좁은 초록 틈에, 안 그래도 조그마한 몸을 동그랗게 말아 앉아있었다. 후 불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이 작은 너에게는 겁이라는 것이 들어있을 자리도 없는지, 무서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커다랗고 새까만 내 앞에 다가와 동그란 눈으로 나를 올려보며 앉았다. 아무리 몸을 웅크리고 무릎을 구부려 바닥에 붙어도 너는 나를 올려다보고, 나는 너를 내려다봐야 했다.
나는 혹시라도 네가 깜짝 놀라 날아가버리기라도 할까 봐 아주 조용히 너를 바라보았다. 금세 나의 인기척을 느낀 어미 고양이가 너의 뒤에서 나를 노려보았다. 어미 고양이는 매우 지쳐있었고, 깔끔 떠는 고양이 답지 못하게 어딘가 많이 아픈 듯 털이 푸석거리고 입에는 굵은 침방울이 매달려있었다. 그런 몸을 이끌고 조금이라도 내가 꿈틀거리면 최대한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하악질을 했다. 너는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그 모과나무 아래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신기한 건지, 궁금한 건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 그저 공허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 너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난히 외로운 시기였다.
모과 같은 너는 외로워 보였다. 왜 하필 모과나무 아래였는지, 땅에 툭 떨어져 검게 변해가는 울퉁불퉁한 모과 같은 나는 너를 보고 외로움을 느꼈다. 나는 너와 함께 외로웠다.
후에 나로 인해 '동구'라고 불리게 되는 동구를 보며 나는 나를 보았다. 그래서 너의 앞에서 묵직한 카메라를 들고 앞으로 우리가 조금은 덜 외로워지길 진심을 다해 바라고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