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지만 단단한 치즈. 01

01. 그들이 사는 세상

by padosoop

지난가을 동네 한 아파트 단지에서 그들을 처음 만났다.


참 외로운 시기였다.

나보다 오랜 세월을 지나온, 벽돌 같은 수동 필름 카메라를 들고 동네 작은 골목 하나까지 돌아다니던 때였다.

짙노란 국화와 천인국이 진녹색 안에 피어나는 작은 꽃밭에서 그들만의 세상을 만났다.

태어난 지 채 1년도 안 되어 보이는 작은 치즈 고양이들. 마치 치즈 아이스크림 한 스쿱처럼 둘은 서로의 몸을 동그랗게 감싸 안은 채 단잠에 빠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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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사실 부족한 시간도 쪼개가며 오래된 아파트 동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에 누군가 정성 들여 꾸며 놓은 무질서한 꽃밭을 찾아갔다. 그렇게 열심히 찾아가면 열에 한 번은 노란 꽃잎이 흐드러진 주변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둘은 항상 서로에게 몸을 붙이고 동그랗게 잠들어 있었다.


그중 얼굴이 좀 더 뾰족해 보이는 친구는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끼면 자다가도 졸린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 약간의 경계심과 호기심을 담아 지나가는 이들을 바라보곤 했다. 마치 아이를 지키는 엄마와 같이, 어쩌면 본인보다 좀 더 통통해 보이는 친구를 지켜주곤 했다. 반면 사랑을 듬뿍 받는 그 통통한 친구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겨우겨우 반쯤 뜬 눈을 금세 다시 감고 잠에 빠지곤 했다. 동그란 얼굴에 꼭 감긴 눈을 보면 다른 어떤 근심과 걱정도 그들이 사는 세상에 비집고 들어갈 수 없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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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고양이들 앞에 그들처럼 동그랗게, 그리고 조용히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맞추고,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뜨며 인사를 하고 있으면 그들과 나만의 세상이 그렇게 차분해졌다.

물과 섞이지 않는 앙금이 가득 담겨있는 나의 바다에는 끝도 없이 바람이 불고 세차게 비가 내려 늘 큰 파도가 밀려오곤 한다. 그러면 영원히 가라앉지 않을 듯이 모래가 뒤섞인 채로 모든 것이 뿌옇게 섞여 앞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무겁고 투박한 렌즈를 통해 그들을 담아내는 그 순간만큼은 모든 앙금이 가라앉고 잔잔한 물 위로 세상이 선명히 보였다. 그들의 보드랍지만 단단한 세상 속에 함께 숨 쉴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라미와 동락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두 어린 치즈 고양이들이 사는 세상에선 말을 하거나 닿지 않아도 그들의 여리고 하얀 말랑함과 조금의 불안함, 그리고 함께 세상에 맞서는 단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그들이 사는 부드럽지만 단단한 세상을 기억해 본다.


하나, 둘, 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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