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11월의 마리골드
동구가 혼자가 된 건 마리골드가 아직 만개한 11월이었다.
몇 번 보지 못했던 동구가 홀연 나타난 곳은 여전히 청포도빛으로 물든 초겨울의 한 화단이었다. 5층짜리 나지막한 아파트의 가장 낮은 층 베란다 앞에는 연두색 화분 4개가 나란히 놓여있었고, 이름 모를 만경류가 허투루 놓인 가느다란 대나무를 타고 창틀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동구는 화분 옆 좁고 반듯한 풀 밭 앞의 작은 구멍에서 자그마한 얼굴을 쏙 내밀고 있었다.
그 보송하고 체소한 몸이 한 뼘 정도의 작은 구멍을 다 메꾸지 못했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검은 어둠이 구멍 안에서 너의 세상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너로 인해 흥분되는 마음을 다잡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뷰파인더 너머로 너와 조용히 눈을 맞추었다.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너의 눈은 너를 감싸고 있는 그 좁고 깊은 어둠만큼 까맣고 깊었다. 처음 만난 그날처럼 너는 그렇게 허망하고 동그랗게 있었다.
예쁘다.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나의 까만 눈이 너의 까만 그곳까지 이어진 건지 너는 천천히 그 동굴 속에서 나와 주위를 노랗게 물들였다. 그리고 소리도 없이 가지런히 그러나 엉성하게 놓인 연두색 화분 위로 올라앉았다. 가장 끝에 놓인 화분에서도 가장 끄트머리에 너는 반듯한 자세로, 그러나 곧 떨어질 듯한 얼굴을 하고 사뿐히 앉았다. 고작 몇 주가 흘렀을 뿐인데 조금씩 그러나 빠르게, 그렇게 너는 노랗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 동그란 눈으로, 건드리면 당장이라도 톡 흘러내릴듯한 눈망울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너는 아름다운 주변 모든 것이 무색하게 외로워했다. 만개한 마리골드가 너의 오른편으로 화분을 가득 채우고 땅으로, 흙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망자의 앞길을 안내한다는 마리골드의 노랗게 빛나는 꽃잎이 추운 계절을 버티고 진하게 흐르고 있었다.
너를 둘러싼 초록과 노랑이, 그 자연의 색이 살아낸 물결이 우리를 타고 흘렀다. 우리의 어둠이 한 꺼풀 벗겨져 그 안의 녹음 속으로 햇빛이 떨어지고 나에게서 너에게로, 그리고 너에게서 나에게로 사늘한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