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지만 단단한 치즈. 04

04. 동구라미

by padosoop

모과가 노랗게 익어 땅에 떨어지는 11월이었다.

뒤집어 보면 까만 멍이 든 모과가 여기저기 누런 낙엽 사이에서 달콤한 향기를 내며 썩어가고 있었고, 창백하고 하얀빛이 얼마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는 겨울이었다.


이런 탓에 퇴근 후에는 고양이들을 보기 어려워져 햇빛이 좋은 주말 낮에 동네를 돌아다녔다. 라미와 동락이가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었던 무성한 꽃밭이 사라지는 시기였다. 꽃들이 지고 남아있는 줄기와 잎들이 메말라가며 눈길 닿는 곳곳마다 색이 바래던 계절. 넝쿨이 된 꽃밭은 경비 아저씨에 의해 존재의 기억을 찾아볼 수 없이 채도 옅은 흙 속으로 깔끔하게 사라졌다.


화려하게 피어나던 꽃들이 사라지면서 몇몇 고양이들도 종적을 감추었다. 모과 만한 고양이가 홀로 견디기에는 가혹한 겨울이 오는데,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함께여도 추운 시절에 두 마리 고양이는 홀로 길을 떠났다.



절대 떨어질 줄 모르던 두 마리 치즈 고양이 중 하나.

동락이는 갑자기 사라졌다. 밥을 챙겨주시던 아주머니가 나타나면 어디선가 달려와 다리에 몸을 부비던, 그러다가도 접시에 밥을 덜면 라미 먼저 먹을 수 있도록 얌전히 옆에 앉아 기다리던 동락이는 훌쩍 독립해 버렸다. 매일 게슴츠레한 눈으로 잠에 취해 있다가 밥시간에만 동그란 눈을 초롱초롱 빛내던 동락이가 혼자서 잘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되다가도 밥은 안 굶고 다닐 것 같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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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동구의 엄마 고양이.

동구의 엄마는 결국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처음 만난 이후로 얼굴이 조금 나아지나 싶었는데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던 탓인 것 같다.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5-6개월 정도가 되면 완전 독립을 한다고 한다. 눈을 뜨고, 걷고, 스스로 밥을 구할 수 있고, 다른 누군가를 대하는 방법을 알게 되는 나이가 오면 엄마를 떠나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동구의 엄마는 동구가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겨우 곁을 지키고 떠났다.



하지만 모두가 떠난 것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하여 반가운 만남도 있었다.

라미와 동락이가 머물던 자리에 동락이 대신 동구가 찾아왔다. 동구와 엄마가 함께 머물던 곳에 라미가 들락거리는 것을 보았는데, 아마도 동구 엄마의 빈자리를 선뜻 라미가 채운 듯했다.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없는 낡고 노란 구조물 위에 라미와 동구가 몸을 붙인 채 앉아 있었다. 이때부터 그들은 '동구'와 '라미'가 되었다.


동그라미. 동구라미. 동구와 라미.

동그란 동구 옆에 함께하는 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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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철에 진득하고 노란 페인트가 흘러내린 자국이 있는 구조물 위 햇빛이 비추는 자리에 라미와 동구는 서로를 부딪치며 남아있었다. 주변의 모든 색이 희미해져 갈 때까지 그 둘은 모든 색을 흡수하여 노랗게 따듯하게 익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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