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이름은 중력을 가져
나니야.
동구라미를 만나려면 빛이 좋은 오후 1시에서 2시 사이에 노란 자리로 찾아가 라미를 불러야 한다. 그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얼굴 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하면 손등을 빨갛게 스치는 쌀쌀한 바람을 친구 삼아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시간을 맞춰 이곳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면 어디에선가 불쑥 나타나 노랗게 앉아있는 그들을 볼 수 있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흰 토끼처럼 시계라도 들고 다니는 건지 시간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보며 그들의 엄격함에 존경심을 표하곤 했다.
동구라미존.
동구와 라미가 빛과 사랑을 듬뿍 받으러 나오는 자리에 붙인 이름이다. 가로수가 박힌 보행로를 가운데 두고 한쪽으로는 나지막한 5층짜리 아파트가, 다른 한쪽으로는 어쩌면 요즘치고 나지막한 15층짜리 아파트가 서있다. 80년대 지어진 아파트인 만큼 동과 동 사이는 지상 주차장으로 메꾸어져 그 회색 빛 아스콘 사이 작은 공간만이 그들을 위해 마음을 열어주었다.
울긋불긋한 블록 길 안으로 나무들이 사는 작은 공간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고, 그 옆 작은 폭의 띠녹지가 잠시 이어졌다. 쓰러질 듯 가느다랗게 무릎까지 올라온 녹슨 진녹색 울타리만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단단한 땅 위로 점묘화처럼 흩뿌려진 잡초들과 띄엄띄엄 수평에 반항하며 굽어 올라온 작은 나무들이 있었고, 그마저도 정체 모를 노란 철로 만들어진 구조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차가운 철판은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붉은 속살을 보였다. 어쩌다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속이 빈 듯 큰 목소리로 텅텅 소리를 냈지만 이상하리만치 따듯한 기분을 만들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서 그 효과는 더욱 빛을 발했는데 주변 모든 색이 겨우내 추위를 피해 이곳에 모여있는 것만 같았다.
뜨문뜨문 옅고 투명한 햇살이 땅에 내릴 때 이곳에 닿는 그것은 유난히도 노랗고 따듯하게 달궈졌다. 고양이들도 이러한 따듯함이 마음에 드는지 햇빛이 내리는 시간이면 꼭 이곳에 나와 눅진해진 빛을 쬐곤 했다.
그렇게 노랗게 익어가는 동구라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보면 종종 경비아저씨가 다가와 말을 걸어오곤 했다. 나에게 말을 하시는 건지 라미에게 하는 건지는 불분명했지만 말이다.
나니야.
아저씨는 라미를 나니라고 불렀다.
나니 또 와있어? 나니는 내가 하나도 안 무섭지?
무심한 듯 다정함이 배어 있는 말투 속에서 나니, 아니 라미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얘는 맨날 여기 와있어. 그렇지 나니야?
말로는 왜 또 여기 와있냐고 물으시면서도 끝끝내 나니의 이름을 부르는 아저씨의 문장은 분명히 나니를 이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나니 라미 나비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라미는 모두에게 꽃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꽃이 되고 싶다.
의미 있는 무언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우리를 외롭게 만들고, 우리를 아름답게 만든다. 나의 존재가 너무나도 가벼워 경계 없는 우주 속 허공을 홀로 떠돌고 있을 때 당신이 나의 이름을 부른다. 그 순간 나에게는 중력이 작용하고, 그렇게 당신에게로 당겨진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아당겨 이 땅 위에 살아간다.
이것이 이름이 가지는 마법일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존재일수록 더 많이 소리 내어 불러야 한다. 그 고유명사가 가지는 진동이 나의 성대를 울리고 공기를 타고 나아가 당신에게 닿을수록 우리는 서로를 끌어당기기에. 더 많은 것을, 하나뿐인 것을 공유하는 사이가 된다.
나니야.
라미야.
오늘도 나는 나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의 이름을 부른다. 내가 발음한 그 단어가 귀를 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마음을 울리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