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지만 단단한 치즈. 07

07. 창가에 선선한 바람

by padosoop

가을로 시작해 새로운 봄이 오고 있다.


가을을 따라 유난히 긴 겨울이 흐르고 여전히 추운 봄의 시작에 닿을 때까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마음의 온도처럼 동구는 매일이 달랐다.


동구를 처음 만난 날 유화 물감을 찍어 올라가듯 울긋불긋한 가지 꼭대기에 가볍게 매달린 묵진한 모과가, 아직은 연둣빛을 품은 노란 모과가 땅에 떨어져 검붉게 멍들어갈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너와 세 번째 계절을 맞이하는 중이었고, 사계절을 한 주기로 치자면 절반이 넘는 시기를 함께 견뎌왔다. 그 사이 너는 새싹이 자라 나무가 되듯 커갔고, 여러 차례 나름의 과도기를 지나는 듯했다. 처음 보았을 때 얼마 살아보지 않은 생명이었기에 너의 변화는 유난히 눈에 띄었고, 그만큼 중대하게 다가왔다. 외적으로, 그리고 내적으로 변화의 파도에 휩쓸리는 듯했고, 다행히 라미가 옆에 있어주어 사변으로 자주 밀려 돌아오지 않고 흐름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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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났을 때 너는 모과 같은 아이였다. 말 그대로 모과만 한 몸집에, 바닥에 널린 낙엽 같이 쉬이 보여 쉽게 찾아내기 어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너를 발견한다면 누구든 기쁘게 놀라고, 가까이 다가가 단단하고 은은한 향기에 매력을 느낄만한 존재였다. 어린 너는 겁이 없었고,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고양이었다.


라미를 만나고 다행히도 너는 장난기가 넘치고 욕심이 많은 철부지 아기가 되었다. 라미에게 끊임없이 장난을 쳤고, 누군가 츄르를 주면 손으로 탁 쳐서 빼앗어 도망가 혼자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고양이가 되었다.


꼬질꼬질하던 털색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가을의 색을 가진 고양이었고, 겨울이 오자 그 색이 빛을 바라듯 선명해졌다. 이제 스스로를 다듬을 줄 아는 고양이가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너는 겁이 많아졌다. 라미가 여유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도 잠든 사이 귀신이 발을 잡아당기기라도 할까 발끝까지 꼼꼼히 이불을 뒤집어쓰는 아이처럼 지붕 밑에 잽싸게 올라가 몸을 숨겼다. 가까이 다가가 부르면 얼굴만 삐죽 내밀고 잔뜩 겁먹은 눈으로 째려보는 것이었다. 이제 도망갈 줄 아는 고양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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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느 날에 너는 외로웠다. 라미 없이 혼자였고, 평상시에 나와있던 자리가 아닌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그곳 모과나무 아래에 있었다. 다른 고양이들처럼 경계심이 많았고, 한동안 먹지 못 한 것처럼 얼굴과 몸이 야위었다. 동그랬던 몸은 각진 뼈가 도드라졌고 그 위로 외로움이 잔뜩 묻어났다. 아직도 붉은빛을 품은 낙엽들이 옅은 바람에도 바스락 거리며 뒹굴었고, 너는 그 한가운데 떨어진 멍든 모과처럼 야윈 얼굴에 광대가 툭 불거지고, 온통 울퉁불퉁해 보였다. 츄르를 주면 가까이 다가와 뺏어가던 녀석이 이제는 하악질을 했다. 나는 그 불안함과 초조함을 안아주기 위해 마른 잎 위에 먹을 것을 조금씩 올려주었다. 조금씩 마음을 여는지 하악질을 하면서도 천천히, 조금씩 거리를 좁혀왔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나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리를 잡았다. 이제 너는 두려움이 무엇인지 아는 고양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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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를 보면 내가 보였다. 너의 외로움과 사랑, 갈망, 원망에서 나의 그것들이 보였다.


너는 무방비 상태의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이게 두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벽을 세운다. 비가 들이칠까 지붕을 만든다. 그 누구도 다가올 수 없게 엄호한다. 그러다 부드러운 손길에 단단하고 높은 한쪽 벽을 허문다. 곧 그 어떤 부드러운 것도 영원히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보드라움이 세상에서 가장 예리하고 날카로운 것으로 변할 수 있음을 배운다. 너는 그 벽에 거대하고 육중한 문을 만들고, 적당한 자물쇠를 찾아 빗장을 걸어 잠갔다. 하지만 다시 그 벽에는 작은 구멍이 나고, 나는 그곳에 유리창을 만든다. 커튼을 달고 싶다. 가끔은 노랗고 따사로운 햇살이 좋아 커튼을 치고 창문을 활짝 열었고, 가끔은 몰아치는 비바람과 천둥번개에 놀라 문을 잠그고, 커튼을 쳤다.


너는, 나는 창이 있는 집을 짓는다.

언제든 선선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이 우리 머리 위를 스쳐갈 수 있도록 창을 낸다.

어둠과 비바람, 밤새 내려앉은 서리와 푸른빛 새벽의 추위를 이겨낼 수 있도록 잊지 않고 창을 닫는다.

나의 세상이 자유로이 눈을 뜨고 감을 수 있도록 커튼을 달고, 자물쇠를 단다.

너를 들여보낼 수 있도록 적당한 크기의 문을 열고, 열쇠를 만든다. 너와 나만이 함께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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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창에 내려앉은 햇살이길 바라본다.

부디 창가를 드나드는 선선한 바람이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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