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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니 Sep 21. 2020

당신이 아닌, 1995년의 H.J가 그리워서

당신이 아닌, 1995년의 H.J가 그리워서







결혼을 앞둔 2019년 봄, 36년간 부모님과 살다가 이제야 독립하는 막내딸이 신혼집에 들어가려 짐 정리에 한창이다. 미니멀리즘을 고집하는 엄마와는 달리 옛 기억과 동행하고 싶은 물건이라면 애지중지하는 나다. 학창 시절에 쓰던 일기장과 수첩,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 좋아하는 가수의 카세트테이프나 CD가 책상 서랍 속에 켜켜이 쌓여있다. 물건 하나하나와 눈 맞춤을 하며 잠시 90년대로 돌아가려던 그때,



'H.J가 드려요'



이미 바래진 카세트테이프 위로 작게 쓰인 글귀 하나. 나는 얼른 1995년 봄으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에 탑승했다.







이제 막 초등학생 껍질을 벗은 중학교 1학년의 소녀. 손바닥을 가릴 만큼의 넉넉한 교복을 입은 똑 단발 여중생 H.J는 같은 학교 한 학년 선배인 J 군에 첫눈에 반한다. 173cm 정도의 키에 구릿빛 피부, 반 곱슬머리에 무테안경이 꽤 잘 어울리던 그. 쌍꺼풀은 없지만, 어지간히 큰 눈에 오뚝한 코, 부담스럽게 두껍지도 애매하게 얇지도 않은 입술. 딱 봐도 공부 잘하는 이미지의 그는 역시나 학급 반장이었고, 플루트 연주까지 잘해 음악실 부장까지 겸했다.








공부에는 재능도 관심도 없는 그녀는 때마침 관심을 둘 표적이 나타났다 여기며 그를 제대로 좋아하기로 마음먹는다. 그중 매일 해야 할 일은 ‘등교하는 그를 만나기’. 그녀는 그가 언제 올지 몰라 제일 먼저 학교에 간다. 담임 선생님께 받은 학급 열쇠를 손에 쥐고 수업 시작 한 시간 전에 도착한다. 그리곤 가방을 내려놓고 창가로 향한다. 창 안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노래 서너 곡을 부르니 저 멀리 교문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단정한 교복 차림에 꼿꼿한 발걸음. 그녀의 눈은 오롯이 그에게 향한다. 운동화를 가지런히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는 그의 별것 아닌 모습에 또 한 번 마음을 빼앗긴다.








그가 온전히 사라질 때가 되면 그제야 자리에 앉아 수업 준비를 한다. '아, 오늘도 수첩 속에 하트 스티커가 붙여지겠구나.' 그때부터 보라색 자물쇠로 마음을 숨겨놓은 일기장엔 온통 그의 이름과 하트 스티커로 가득하다. 그가 그녀의 존재를 몰라준다고 해도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체육 시간이나 매주 토요일에 있는 특별활동 시간에도 그의 모습이 보일 때면 그녀는 숨죽인 채 사랑을 했다. 최대한 들키지 않으려 그렇게. 반에서도 있는 둥 없는 둥 조용한 그녀인데 어찌 감히 그에게 정체를 드러낼 수 있나. 말도 안 된다. 물론 사랑이란 서로 나눌수록 배가 되겠지만, 당시 그녀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의 조용한 사랑도 어느덧 한 해를 넘겼다. 한 살 먹은 나이와 함께 자신감이 솟았는지 큰 결심을 한다. 그에게 줄 편지와 좋아하는 노래를 공테이프에 녹음해 선물하기로. 물론 비대면 전달이다. 다른 건 몰라도, 실행 하나는 빨랐던 그녀는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벗과 함께 계획을 세운다. 일요일 오전, 뜬눈으로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편지와 사랑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를 들고 학교에 간다. 누가 들을세라 까치발을 들고 3학년 4반 교실로 향한다. 이때 그녀의 벗은 매의 눈으로 망을 본다. ‘34번 ㅎㅈㅁ’ 책상 위에 붙여진 그의 이름만 봐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사치다. 누가 보기 전에, 오기 전에 얼른 서랍 속에 넣고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오래갈 것만 같던 그녀의 사랑에 종지부가 찍히는 날이 온다. 그해 겨울, 그가 같은 학년인 K 언니에게 고백했다는 말을 들은 까닭이다. 둘만의 음악실에서 플루트로 사랑의 세레나데를 들려준 그. 풍문이길 바랐지만 사실이었다. 그녀의 친언니가 K 언니와 같은 반이기 때문이다.



그날 그녀는 세상 가장 서럽고 억울한 여인처럼 울고 말았다. 그녀의 정체를 몰라도 좋지만, 그건 아무렴 상관없지만, 그동안의 노력이, 사랑이 물거품이 돼버린 것 같아 서러웠다. 밥도 안 먹고 문을 잠근 채 그를 보내는 마지막 시를 썼다. 눈물과 범벅이 된 글자는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종이 위를 넘실넘실 춤추고 있었다.




'아, 기말고사 잘 보라고 준비한 중학교 마지막 선물인데...'








처음으로 느끼거나 맺었던 사랑을 ‘첫사랑’이라 정의한다. 그렇다면 대화 한 번 나눈 적 없지만, 사랑의 감정을 처음 느낀 그를 나의 첫사랑이라 해도 무관하리라 본다. 23년 동안 전하지 못한 노래를 보니, 이제는 그가 아닌, 그때의 내가 그리워 눈시울이 붉어진다.




'1995년의 H.J, 너는 참으로 맑고 순수했구나.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는 거야!'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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