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릿속에 무언가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책이나 악기 등의 필요한 장비를 바로 구입하거나 관련 수업을 신청해요. 실행이 빠르긴 한데 또 포기도 빨라요. 관련 장비를 구입 후 짧으면 하루, 길어야 1년 이상을 넘기지 못하거든요. (평생 가야 할 길인 '책 쓰기'는 예외입니다) 작심삼일이 될 줄 알면서도 나는 또 무언가에 혹해서 수강이든 장비든 결제 버튼을 누릅니다.
며칠 전에 또 일을 저질렀어요.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프리즈마 색연필을 샀습니다. 그것도 132가지로요. 잠자던 나의 '장비발 세우기'가 또다시 꿈틀거린 셈이에요. 근데 이건 할 말이 있어요. 충동적인 감정으로 구매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쓰면 쓸수록 더욱 진해지는 소망이 있어요. 바로, 내 책에 내가 그린 그림을 함께 넣는 것입니다.
아, 우리 집에도 남편이 쓰던 색연필이 있어요. 하지만 시작할 때 뭔가 새 걸로 새롭게 하고 싶어서요. 맞아요.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 책장에 꽂힌 수많은 문제집을 뒤로한 채, 학습지 '핫스터디'를 해야만 반드시 성적을 올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셈이죠. (내가 그랬어요)
장비가 도착하니 뿌듯하구나!
나는야, 똥손계의 금손!
솔직히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요. 내가 어마 무시한 '똥손'이라는 사실을요. 어느 정도로 똥손이냐고 물으신다면, 음... 일단 요리를 못해요. 레시피를 보며 과정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여도 무언가 부족한 맛이에요. 요리를 잘하지 못해도 흥미가 있다면 할수록 늘겠지만, 흥미마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주부 3년 차인데 손을 놓진 않아요. 매일마다 찌개든 국이든 밑반찬이든 주물럭대긴 해요. (그래, 자랑이다) 어제와 오늘은 8개월이 된 튼튼이를 위해 단호박빵이랑 바나나 티딩러스크(치아발육기 과자)도 만들었답니다. 크큭.
뜨개질이나 자수하는 건 꿈도 안 꿔요. 학창 시절 '가정' 시간에 하는 모든 과제는 '금손'을 장착한 엄마나 언니에게 부탁했어요. 나는 이 역시도 흥미가 없어요. 쩝. 20대 때 몇몇 친구들이 직접 뜬 목도리나 장갑, 니트 등을 자신의 남자 친구에게 선물할 때, 나는 남의 집 불구경하듯 했습니다. 내게는 꿈도 못 꿀 일이거든요. 완성도를 떠나서 정성이 중요하다지만, 내가 못하니까 할 생각 자체를 접게 돼요. 흥미도 없고요.
이번엔 길~게 가 보자!
이번에는 달라! 이유가 있는 장비발!
희한하게도 그림은 다릅니다. 아무래도 내가 사랑하는 '책'과 연관이 있다 보니 나름대로 정이 가나 봐요. 하여, 프리즈마 색연필과 브리스톨 스케치북 등을 구입했어요. 장비는 다 갖추면서 정작 수업에는 돈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온라인 '색연필 그림 수업'을 3개월 결제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하지 않았어요. 유튜브에 검색하니 괜찮아 보이는 영상이 있더라고요. 아직 나는 왕왕왕초보자니까 무료 영상으로 배운 다음, 나름대로 흥미가 붙고 좀 더 실력(이라고 말하니 웃기죠?)이 쌓이면 제대로 수강하려고요.
'시작이 반'이라고 색연필이 집에 도착하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어요. 아마 심장도 놀랐을 거예요. '어이, 주인장! 네가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림을 그린다고 장비를 구입해?'라며 콧방귀를 뀌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렴 어때요. 설령 작심삼일로 끝날지라도 지금의 감정을 즐기렵니다. 조심스레 입방정을 떨자면, 이번만큼은 관심의 온도가 오래 지속될 것 같아요. 색연필 그림 그리기를 '그냥' 하려는 게 아니라, '목표'가 뚜렷하잖아요. 내 책에 그림을 넣고 싶다는 목표! (언제는 뭐, 목표가 없어서 하루 만에 그만 뒀니?)
내 꿈을 이뤄주렴 :)
나처럼 우주 大똥손이 목표를 이룬다면, 많은 분이 '똥손인 이지니도 해냈는데, 나도 도전해 볼까!'라며 희망을 얻지 않을까요? 대상이 꼭 그림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오랜만에 만난 또 다른 장비발이 출산 후 풀어진 내 열정의 나사를 조여 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