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니 에세이 <아무도 널 탓하지 않아>
요즘 26년 만의 이사를 준비해요. 이삿짐 정리를 하려니 방 한편에 있는 책장이 눈에 띄네요. 천장에 닿을 듯 말 듯한 높이, 서른 개로 된 정사각형 모양의 책꽂이 안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읽은 책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어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상자에 넣으려 할 때, 엄마가 나를 막아요.
“이것도 미련 없이 버려.”
“무조건 버리면 안 돼요!”
“저건 다 뭐야?”
“이거? 잠깐만…”
줄다리기라도 하는 듯 실랑이를 벌이던 중 추억이란 이름으로 고이 모셔둔 노트가 하나둘 고개를 내밀어요. 한 해 한 해 무슨 할 말이, 기억하고 싶은 것이 그리 많았는지. 마치 미인 선발 대회라도 하듯 노트 안은 각양각색으로 몸치장이 되어 있고요. 이들의 공통점이 있는데요, 그건 바로 맨 앞장에 꼿꼿이 자리 잡은 ‘계획표’ 예요.
“너 뭐해? 또 계획 짜는 거야?”
“‘또’라니? 그래야 실행하지!”
“하하, 그거 만들 시간에 움직이겠다.”
“걱정 마, 이렇게라도 안 하는 언니보다는 나으니까.”
언니의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이유는 밤이 되면 잠을 청하고, 아침이 되면 눈을 뜨듯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죠. 일단 계획은 이래요. 1년, 1개월, 일주일, 하루 단위로 노트에 적어요. 특히 1년 단위는 올해부터 앞으로의 5년까지를 적는데요, 그리고는 이미 다 이룬 것 마냥 분홍색 잇몸을 드러내며 흐뭇해합니다.
여기서 잠깐! 만약 계획한 대로 일을 진행하지 못하면? 두 말도 필요 없이 다시 작성해요. 아쉬워하거나 슬픈 표정은 필요 없어요. 그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새로 작성하면 그만이에요. 언니는 이런 나를 1년에만 수없이 봤으니 한심한 생각을 안 하는 게 이상할지도 모르죠.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방학을 맞이하기 전 생활 계획표 만들기는 통과의례였어요. 하얀 도화지 위에 컴퍼스 혹은 냄비 뚜껑을 대고 동그랗게 원을 그려요. 원 안에 오롯이 자신의 생활 패턴에 맞게 24시간을 채워야 해요. 이때가 가장 스릴 있는 시간이 아닐 수 없어요. 내가 짠 계획대로 방학을 맞이하게 될 테니 말이에요. 아마도 나를 계획 중독자로 이끈 건 바로 이때부터인 듯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나이 서른이 가깝도록 노트마다 그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물론 계획한 대로 흐르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내일 일도 모르는 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니까요. 그렇다고 아무런 계획 없이 살 수는 없고요. 계획표를 작성하는 행위 자체에는 문제가 없단 말이죠. 그럼 왜 실행으로 연결되지 못한 걸까요? 나는 이 짓(?)을 10년 넘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뚜렷한 목적이 없는 계획이 오히려 독을 낳은 것이죠. 게다가 내 처지와 상황, 수준에 맞지 않는 무리한 계획도 한몫했고요. 한 입에 다 넣으면 쉽게 체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계획에 있어서만큼은 욕심이 과했던 겁니다.
2015년 겨울, 첫 번째 저서를 준비하던 때가 생각나요. 비록 종이책이 아닌 전자책이었지만 내가 직접 쓴 책이 세상에 나온다는 생각에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한 날이 잦았어요. 새벽에 핀 안개처럼 뿌옇게만 느껴진 작가의 길에 발을 내딛을 수 있음에 심장이 요동쳤어요. 누구보다 절실했고, 간절했어요. 오직 이 길만이 유일했으니까요. 절실함은 즉시 뚜렷한 목적을 가져다줬어요. 눈을 뜨기가 무섭게 만들던 계획표도 생각나지 않았죠. 그날 할 일은 컴퓨터에 자동으로 저장되듯 머릿속에 재빠르게 입력됐고, 바로 실행으로 옮겼어요. 휴대폰 메모장에 ‘오늘 할 일’이라고 적어둔 몇 자가 전부예요. 뚜렷한 목적과 간절함, 거기에 마감일까지 더해졌으니 실행까지는 시간문제였죠. 그 뒤로 몇 달이 지나 언니에게서 전화 한 통이 왔어요.
“요즘도 계획표 만들어?”
“무슨 소리야?”
“얘 좀 봐, 밥 먹듯이 할 땐 언제고.”
“하하, 작별한 지 오래됐어.”
그동안 계획표로 그은 선을 다 모으면 우리 동네 세 바퀴는 넘지 싶어요. 만약 뜬구름 잡는 계획만 하고 있다면 도시락 싸 들고 말리고 싶네요. 오히려 밤하늘 위에 살포시 앉아 있는 별을 따는 게 낫지 싶을 정도니까요.
지금 수첩을 꺼내 계획을 적으려 한다면 먼저 자문해 봐요. 정말로 당신이 원하는 일인가요, 아니면 무늬만 그럴싸하기 위함은 아닌가요? 목적이 희미한 계획은 오히려 독이 돼요. 확고해야만 실행할 확률도 높아질 테니까요. 진작 이 비밀 같지 않은 비밀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요. 그만큼 내가 잘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니 자책은 이쯤에서 그만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