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한워킹맘 Nov 01. 2019

김밥 속 재료 개수에 집착하는 엄마

3개여도 충분한 것을

"다연아, 내일 체험 학습 갈 때 도시락 뭘 싸 줄까?"

"응, 유부 초밥이랑 문어 소시지!"

"유부 초밥? 김밥 싸주면 안 돼?"

"김밥 싫어. 난 유부 초밥이 좋아"

"그냥 김밥으로 하자~. 엄마는 김밥이 좋단 말이야."


체험 학습 도시락으로 유부 초밥을 고집하는 딸아이와 이야기를 하다  모르게 김밥을 좋아하다는 고백까지 나왔다.


그러고 보니 나는 김밥을 정말 좋아한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밴 하얀 쌀밥에 까칠한 김을 말고 그 속에 내 맘대로 재료를 골라 속을 채운 김밥은 한 끼 식사로 든든하고 영양도 만점이다.


학교 다닐 소풍날을 기다렸고, 중간고사 기말고사 시즌이 되면 엄마한테 투정을 부리며 김밥을 주문했다. 결혼하기 전까지 김밥은 나에겐 참 쉬운 음식이었다.




엄마가 되니 내가 먹고 싶은 김밥은 내가 직접 말아야 했다. 이미 엄마 김밥에 길들여진 나에게 김밥○○은 천국이 아닌 지옥의 맛이었다. 아이들 유치원 소풍, 초등학교 체험학습, 주말 가족여행 가릴 것 없이 내 손으로 김밥을 말았다.


김밥 직접 만드는 입장에 서면 참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1. 단무지를 헹궈 노란 물을 씻어내고 식초 설탕에 담그고

2. 당근을 씻고 시금치꼭지를 따 다듬에 헹구고

3. 당근을 썬다.

4. 당근을 써는 사이 시금치 데칠 물을 올린다.

5. 올리브유 살짝 둘러 당근에 소금 솔솔 뿌려 아주며

6. 사이 물이 끓으면 시금치를 데쳐 찬물에 헹궈낸다.

7. 시금치를 꼭 짜서 그릇이 옮기

8. 햄을 길쭉하게 어묵도 길쭉 날씬하게 썬다.

9. 프라이팬을 올려 달궈지는 사이

10. 꺼내 놓은 계란을 깨 소금 한 꼬집 넣고 풀어 둔다.

11. 햄을 노릇노릇 구워내

12. 프라이팬을 치킨 타월로 닦고 계란붓는다

13. 프라이팬을 하나 더 올려 어묵을 볶다

14. 지단을 한 번 뒤집에 불을 끄고

15. 어묵에 간장+설탕물에 조려낸다.

16.  짜둔 시금치에 소금 깨 참기름 둘러 조물조물

17. 시금치 조 무린 그릇에 고슬고슬 밥을 푸고 소금 두 꼬집에 깨와 참기름을 쪼르륵 담아 식히는 사이


17단계를 거쳐 준비된 김밥  재료를 일렬종대 배치하면 이제야 김밥을 말 준비 끝


참치 김밥 싸던 날, 속 재료 7개



단무지, 시금치, 당근, 계란지단, 햄, 어묵


기본 6개의 김밥 속 재료를 준비하기까지 이렇게 많은 단계의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남편은 알고 있을까? 머릿속으로 다음 동선을 그리며 미친 듯이 주방을 헤집고 다녀야 간신히 1시간 내에 준비가 끝난다. 이나마 엄마 10년 차 김밥을 좀 말아 본 여자가 되고 나서야 체계가 잡혔다. 초보 시절엔 속 재료 준비에만 2시간도 넘게 걸렸다는 슬픈 전설이 남아있다.


김밥 재료 준비에만 2시간이 걸리던 시절에도 나는 김밥 속 재료 6개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우엉조림이나 게맛살, 가끔은 마요네즈에 버무린 참치까지 추가되어 8가지 속재료를 준비하 아등바등 김밥을 말았다.


나는 왜 김밥 속 재료 개수에 집착까?


김밥의 정석 (출처: pixabay)




체험학습  아침 눈 뜬 시간 5시 30분. 출근하기 전까지 도저히 김밥 쌀 시간이 안 나와 결국 유부초밥과 문어 소시지로 도시락을 채워 보냈다. 냉장고에 모셔둔 김밥 속 재료는 소진해야겠기에 그날 저녁 아이들 저녁으로 김밥을 말았다.


"엄마, 너무 맛있어요. 한 줄만 더 싸 주세요~"

"벌써 2줄이나 먹었는데. 또? 이제 그만 먹어야지"

"제발요, 너무 맛있단 말이야"


3개로 뚝딱 만든 마약 김밥^^


단무지, 계란지단, 햄


퇴근 후 시간이 없어 딸랑 3개 재료만 뚝딱 준비해 말아 김밥인데, 이렇게 아이들이 환장을 하다니. 아이들이 잘 먹으니 좋았지만 10년간 무수히 말아제낀 김밥들에게 미안함마저 느껴졌다. 오물조물 입속에 들어가면 한 줄 먹어 치우는데 3분도 채 안 걸릴 김밥을 2시간을 공들여 말아 왔다니 가성비 제로인 음식임이 틀림없다.


6하 원칙도 아닌데 김밥 속재료 숫자 6에 나는 왜 그렇게 연연했을까. 


고정관념 

시금치, 당근, 우엉 등 아이들이 잘 먹으려 하지 않는 야채 친구들을 넣어야 엄마표 김밥의 완성이라 흔히들 이야기한다. 꼬꼬닭으로 변신한 메추리알에 피카추 모양 장식의 도시락을 준비하는 엄마들을 보면서 느낀 위축감을 김밥 속 재료 6개로 때우려 했다. 첫째 아이는 김밥보다 유부초밥을 더 좋아하고 둘째는 단무지, 햄, 계란만 넣은 김밥에 99점 최고 점수를 주었건만, 김밥 속 재료를 많이 넣을수록 정성이 돋보이고 그래야 좋은 엄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  

일하는 엄마니까 일도 물론 잘 해내고 살림도 만만치 않게 잘한다고 보여 주고 싶었다. 이는 다만 김밥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나는 썰어 놓은 김밥의 로 단면처럼 남들에게 보여지는 삶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해 왔다.

'미니멀 라이프, 새벽 기상, 감사일기, 3P 바인더, 1일 1포 스팅 등 '

김밥 속 재료 개수에 집착하듯 내 삶에 꾸역꾸역 그럴싸한 재료를 넣어보려고 노력했었다. 8개면 뿌듯하고 6개를 채워야 안도감을 내쉬는 김밥처럼 나의 삶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더 잘하려고 할수록 더 뒤처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김밥 속 재료는 3개만으로도 충분하다. 나의 삶 또한 내가 좋아하는 재료만 최소로 넣어 가성비 높은 삶을 살고 싶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한 삶 말이다. 머리로는 이제 이해하지만  몸으로 행하기까지 참으로 고역의 길일 것이다. 쉬웠다면 그냥 '목숨'일 것이고 어려우니 '삶'이라 불릴 터이니 어려워도 해보아야겠다.

저 반지르르 빛나는 김처럼 나의 삶도 빛나기를




이 글을 쓰면서 또 김밥이 먹고 싶어 진다.

이번 주말에도 김밥이나 말아보아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