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한워킹맘 Oct 23. 2019

여권 신청하러 갔다 강원도 옥수수를 사다.

이게 인생! 순리대로 살자

"다음 주에 휴가 낸다고 이야기했어요. 어디 갈까?"(남편)

"계획 세워야겠네. 아. 애들 학교도 빠진다고 얘기해야겠고.  월~목?  금?"

"제주 OOO호텔, 작년에 간 할인하는 것 같은데."

"...(대답 없음)"

"4박, 사이판은?" 

"조아 ㅎㅎ"


출국 4일을 남긴 요일 저녁 퇴근길 카톡으로 갑자기 무전여행을 떠나듯 우리의 휴가가 정해졌다. 우리 부부의 휴가 준비는 이렇듯 늘 한결같다. 며칠 남기지 않고 장소를 정하고 그렇게 불쑥 떠나는 여행. 1년 전에 얼리버드 항공을 예약하고 최소 2~3개월 준비하여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본다면 기가 찰 노릇이지만 나는 이렇게 훌쩍 떠나는 자유 여행이 좋다. 더군다나 곧 부서 이동을 앞둔 나의 심란한 마음을 정리할 겸 이동하기 전에 휴가를 다녀오는 것이 마음이 편했던 터라 갑작 스런 여행이 싫지만은 않다.


그날 밤 9시 30분, [사이판 vs. 괌] 우리의 여행지를 두고 남편과 최종 결정을 위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역시 좋은 세상이다. 출발 4일 전인데도 집에 앉아 비행기 일정을 확인하고 해외에 있는 호텔 숙박비를 저울질할 수 있다니 말이다. 이 모든 게 핸드폰 하나로 다 되는 세상.

예전에 외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내가 전기도 안 들어오던 그 깜깜한 세상을 어찌 살았을까.." 웃으며 말하시던 게 떠오른다. 나도 할머니가 되면 손주들한테 이렇게 이야기하겠지?  

"내가 어릴 적 핸드폰도 없던 그 깜깜한 세상을 어찌 살았을까. 이 할미가 대학생 때는 삐삐라는 게 있었지 뭐니"


항공권과 호텔을 알아보는데 문득 아이들 여권이 떠올랐다. 올 초에 이사 오면서 내가 어디다 챙겨뒀더라? 다행히 화장대 서랍에 고이 모셔져 있어 찾기는 금방 찾았는데

앗. 불. 싸. 여권 만료일 03 JAN 2019 


초록 검색창에 '사이판 호텔'을 치던 남편은 어느새 '여권 발급 빠른 곳'을 치고 있었다.


"서대문구청이랑 광진구청이 3일 만에 나온다는데" (남편)

"AC~  나 또 낼 휴가 내야 돼? 그래도 내일 아침에 신청하면 금요일엔 나오겠네. 그나마 다행이야."

"내일 수고 좀 해줘" 

"아, 근데 아이들 여권 사진 찍어야 하는데. 아침에 사진 찍고 가면 학교 늦겠는 걸?"

"가만있어봐" 


남편 손은 다시 초록 검색창에서 'OO 마을 사진관'을 빠르게 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동네 사진관 사장님 덕분에 아침 8시 20분에 여권 사진을 찍다니! 천사 같은 인상의 사장님은 최근 들어 만난 자영업 사장님 중 최고의 고객 감동을 나에게 선사해 주었다. 전날 저녁 영업시간이 끝난 시간에도 전화를 받은 사장님은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아이들 학교 가기 전까지 사진관에 와주시기로 다. 보통 10시에 문을 연다고 하는데, 아이들 늦지 않게 해 주려고 2시간이나 일찍 와주셨다. 다음에 이 사진관에서 꼭 가족사진을 찍으리라 다짐하며 사진관을 나왔다.  


"금요일 오후 2시 이후로 오시면 여권 찾으실 수 있어요" 


'휴~. 이제 됐다.' 그렇게 일산에서 서대문구까지 차를 몰아 아이들 여권 신청을 마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맘 놓고 토요일 저녁 비행기표를 끊을 수 있게 되었다. 한숨 돌린 나는 그제사 서대문구청 앞마당에 펼쳐진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강원도 농수특산물 직거래 장터"

(일시: 2019. 10/22~23)



숨 가쁜 아침을 보내고 사무실에 털썩 주저앉은 오전 11시 40분, 내 손에강원도 옥수수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주차장 차 트렁크에는 강원도 감자와 고구마까지 모셔져 있다.



딱 하루 전 이 시간, 나는 다음 주에 사이판으로 여행을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그건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집이 일산이고 회사가 마곡인 내가 서대문구청에서 강원도 옥수수를 사서 먹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후배들 먹으라며 옥수수를 나눠 주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아침에 나는 왜 거기까지 갔으며 왜 또 옥수수를 사서 사무실에 들고 왔는지. 이게 엄마가 말하던 인생일까?


18년 매일 같이 반복되는 출근과 퇴근에 나는 지쳐 있었나 보다. 가끔 옥수수 같은 것들이 잠시 나를 달래 주기도 했지만 싫은 것도 없고 좋은 것도 없는 일상의 반복에서 나는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나 보다.

나의 육신은 회사와 집을 오가지만 내 마음의 영혼은 갈 곳이 없어 방황하며 메말라가고 조금씩 닳고 닳아 무뎌지고 있었나 보다. 퇴근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붕어빵 2개를 사서 먹으며 터벅터벅 걸어오던 날, 그냥 이유 없이 눈물이 쏟아지기도 했다. 집으로 오는 그 길가에서 갈 곳 없는 내 영혼을 느꼈던 날이었나 보다.


바보같이 무뎌진 마음이 때론 회사 생활에 도움이 될 때도 있음을 위안 삼으며 버텨 왔다. 그 모든 걸 퉁쳐서 누군가는 '연륜'이라는 단어로 좋게 포장해 주기도 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지쳐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새로운 변화가 다가오는 것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최근 회사의 변화 속에 팀의 해체와 부서 이동을 눈 앞에 두어서인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처음에는 분노로 때론 좌절 그리고 체념까지 이어졌지만 두려워하지 말자. 이게 인생이지 별게 인생이겠어.


아무도 내일 일을 예상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100억 부자도 가난한 비렁뱅이도 이 점에는 참 공평하다. 나는 예측할 수 없는 파도에 그냥 몸을 맡기기로 했다.

 

"현진아, 너무 애쓰지 말고 순리대로 살아" 

엄마가 해주시던 말이 마음에 와 닿는 날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