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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andra the Twinkling Mar 05. 2016

자유로운 시절 일기 12

가족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마음 속이 아련해지고, 한쪽 가슴이 아프고 미안하거나 죄스러운 마음이 드는 사람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이란 걸 그들은 알까?

누군가에게 가슴 속에 사무치는 그 단어가 어떤 사람에게는 아픔일 수도 있고, 고통일 수도 있으니.

존재 자체로 불행을 주는 단어일 수도 있고, 희망과 행복의 씨앗일 수도 있는 신기한 것이다. 가족이란 것은.

어느 가족이나 문제가 있고 고통이나 아픔을 겪을 수 있지만, 그래도 그 모두를 가족이라는 단어로 묶을 수 있는 그 어떤 평범성이나 보편성이라는 평균치의 수준이 있는 것인데.. 나에겐 하나 하나가 비정상적이고 평균치를 벗어난 보편적이지 않은 구성원들로 인해 참으로 오랫동안 그 단어를 떠올리는것 조차 거부했던 적이 있다.

물론, 덕분에 사람에대한 광범위한 이해력도 얻었고, 사람으로 인해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크디큰 상처를 받는 일은 이제는 없는 것 같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고 발버둥치며 옳지 않음에 억울해하며 울고 분노했던 날도 있었고, 최대한 논리적으로 비판하며 잘잘못을 따져서 그 옳지 않음을 일깨워주는 노릇도 해보려 했었다. 여전히 소위 '죄목'을 따져서 당신이 옳지 않다는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는 욕구가 입밖으로 큰 소리로 뛰쳐 나오려고 하는 것을 억눌러야 한다. 하지만, 그러면 나도 같은 사람이 된다. 평생 그들과 같아지지 않으려고 정신과 상담까지 받으며 노력해왔으니 계속 노력해야지.


여전히 사람들의 행동이나 작은 말 한마디에 삐져서 그 감정 때문에 큰일을 자주 그르치고 어른스러운 결정을 할 줄 모르고, 근거 없고 사실과 무근한것이 명명백백해도,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제시해도 자기가 무조건 옳다고 우겨야 이긴다고 생각하는 엄마, 바람기가 너무 심해 '배다른 형제들'과 '새엄마들'을 첫 부인의 자식들에게 선물해 주고도 풍류를 과하게 즐기셔서 여전히 가족애가 무엇인지 모르고 본인 몸뚱이 하나 살리기 위해 과감히 그때 그때 필요 없는 가족들을 버리면서 타국으로 도망갔던, 부성애도 없어서 아빠가 아니라 꼭 사장님 같은 아빠, 극심한 마마보이라서 이모들에게 험악하고 거친 언행도 마다하지 않고, 엄마의 소심한 잘 삐지는 성격에 바람기 심한 아빠를 잘 섞어놓고도 거기에 결벽증에 편집증까지 있는 남동생 사이에서 무슨 드라마 찍는 것도 아닌데도 평생 드라마 찍는 기분으로 내가 사는 이곳은 현실이 아닐것 같은 희안하고도 답답하고 자주 슬픈 상태로 살아왔었다.


같이 살 때도 잘 보지 못했던 우리 아빠. 평생 집에다가는 출장을 핑계로, 회사에다가는 가족을 핑계로 회사 돈을 횡령해서 전세계에서 안가본 나라는 북한 뿐이라고 큰소리 치며 자랑을 하신다. 1년중 2-3개월만 아빠를 볼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졸업식때도 입학식때도 내 피아노 콩쿨이나 발표회, 혹은 내가 출전했던 소년체전때에조차도 단 한번도 우리아빠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아빠의 애인은 본 적도 있고(??너무 어릴때라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빠의 성향을 봐선 사실일 것 같음이 다분하다) 친엄마 아닌 다른 두분의 새엄마와 같이 살기도 했었다. 그분들의 자식들도 다 잘 알고 지낸다. 한번은 내가 대학 등록금은 알아서 해결했으니, 대학원에 진학하게 도와달라고 아빠에게 부탁 했더니 정색을 하면서 '그 돈으로 너가 정말 공부를 할지 아니면 내돈을 훔쳐가기 위한 핑계인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 하며 싫다고 하신 그 분은 새엄마들의 자식들에게 미국유학, 한국유학에 대학등록금 일체에 결혼비용에, 집까지 장만해주셨다. 난 어학연수도 내돈으로 해결했고, 집도 신랑하고 대출받아 장만했고, 결혼비용도 신랑이 직장다니며 모은돈으로 감당했다. 그렇게 자주 보지도 못한 그분은 내가 고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어마어마한 부도를 내고 타국으로 도피하셨고, 우리집은 매일매일 빚쟁이들로 북적거리기도 하고 밤새 문앞에서 욕하고 우는 사람들때매 시끄럽기도 하고 또, 집안에 붙은 빨간 딱지 때문에 아주 오래도록 이사를 가지도 못했다. 이사가기위해 거의 매일 구청에가서 사정을 했었다. 첫번째 부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빠 차를 팔면 빚을 일부 갚기로 약속을 했다고 그러던데, 그 차를 팔던 날 말도 없이 그 돈과 함께 사라지셨다. 덕분에 내 대학생활은 공부를 하러 다닌 기억보다 돈을 버느라 잠못자고 고생한 기억이 더 많다.


같이 살 때도 같이 사는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우리 엄마. 평생 내 귀에 딱지가 않도록 나의 욕과 아빠의 욕을 해댔다. 아니, 아빠의 욕도 해댔다. 취미는 다른사람 뒤에서 험담하기이다. 난 아빠와 닮았다고 하나에서 열까지 욕을 먹어오고 있다. 여태까지. 아빠의 험담을 20단 콤보로 쉬지 않고 카테고리별로 할 수 있는데, 아빠험담 경력이 약 20년을 넘어갈때 즈음 부터 본인이 욕하던 그 행위를 당신이 그대로 따라하고 있더라. 이게 바로 진정한 세뇌가 아닌가 싶다. 우기는 대회가 있으면 아마 월등한 차이로 1등을 하지 싶다. 얼마 안된 따끈따끈한 우기기 사건은 전국민이 다 아는 모 연예인의 이란성 쌍둥이 아이들이 사실 쌍둥이가 아니라고 TV에 나와서 얘기 했다고 우긴 것이다. 중요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본인은 100% 정확하게 본인의 귀로 들은 사실이라고 끝까지 우겨대더라. 물론 이건 아주 하찮고 작은 의미 없는 진실이라 상관없지만, 그 주제가 심각하고 집안을 뒤흔들 수 있는 사실이더라도 사생결단으로 우긴다. 저명한 심리학 박사를 안다면 연구대상으로 던져주고 싶다. 최고의 자부심을 갖고 살고 있는것이 하나 있는데, 자신이 학교다닐 때 연애를 한번도 안해봤음에도 수많은 선자리에서 언제나 인기가 많았고 장동건 뺨치는 사람이 따라다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뛰어나게 잘했다고 한다. 당신의 자식들은 자신의 발톱도 못따라간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그리고 아빠가 해외로 도피하고, 학원에서 밤 12시까지 강의하던 엄마 덕분에 내가 키우다시피한 내 동생. 정말 잘생기고 기본적인 성품은 착해서 워낙에 사랑하지만. 뒤틀리고 자존감이 낮아서 하나뿐인 누나에게 본인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아니 본인이 해야만 하는 허드렛일이나 심부름을 하인에게 시키듯 시키고는, 그에 대한 비용을 청구하거나 당연한 작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할 때나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대답하지 않았고, 말투가 기분나쁘다는 이유로, 또는 비용을 청구했다는 이유로 천벌을 받을 년 취급을 하며 절교를 선언한다. 아주 자주. 엄마를 버린 아빠를 저주하고 증오하면서 본인은 양다리, 아니 문어다리, 어장관리를 밥먹듯이 하며 그건 전혀 틀린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동거하던 처자가 일하러 간 사이 백수였던 이 아이는 바람이 나서 동거하던 처자 몰래 살던 집을 빼고 날랐다.


짧고 간결하고 주요한 점만 썼는데도 재미있네. 내 가족의 에피소드를 다루면 아마 30년치 분량의 시트콤이 나올 것 같다. 글로 읽어보니 참 버라이어티하고 현실감 떨어진다. 차마 쓸 수 없는 이보다 더 한 것도 많은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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