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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andra the Twinkling Sep 17. 2016

자유로운 시절 일기 18

첫사랑. 세엣


첫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준이 뭘까???


처음 손 잡았던 사람? 처음 키스 해 본 사람? 처음 잠자리를 허락한 사람?

진짜 모르겠다.ㅎ 

내겐 플라토닉 했던 첫사랑이 있고, 진짜 원초적이었던 불같은 첫사랑이 있고, 그리고 바로 이게 사랑이다 라고 느낀 첫사랑이 존재한다. 셋 다 나에겐 첫사랑이다. 

중학교 시절의 극히 플라토닉했던 그 풋풋한 사랑의 기억이 거의 내 일생의 연애 전체에 깔려있는 듯 하다. 아마 그만큼 강력했고, 그만큼 순수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와는 손을 잡은게 다였다. 그것도 그의 생일에 단 한번. 따뜻하고 촉촉했다. 그의 생일에 비가 살짝 지나갔기에 비가 오면 생각나는 사람도 그 사람이고 여전히 러브스토리가 나오는 영화를 보면 차분하고 아련하게 떠올려지는.. 배시시 입꼬리가 올라가는 추억이다. 

페이스북, MSN메신저, google+ 이런 경로로 찾아보려고 노력했었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나의 중학교 3학년 시절. 10월. 굉장히 옛날 얘기인데도 여전히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L의 생일이었다. 한달 내내 선물을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케익을 주문했다. 2층짜리로. 중학생이 참 간땡이도 컸다. 하지만, 내가 선물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온 학교가 떠들썩 하도록 엄청 큰 선물을 준비했던 L에게 작은선물을 주고싶진 않았다. L은 적어도 날 만나러 나오지 않겠다고 튕기지는 않았으니...ㅠㅠ 나름 2층 케익을 디자인해서 그를 위해 글도 새기고. 하트도 그리고.. 또 당시 우리반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박학기 CD도 샀다. 그리고 작은 애교로 하트모양 은박 풍선도 두어개 사서 케익에 매달았다. 전형적인 여자아이가 준비한 선물모양새였다.  

약속 장소가 가까워질 수록 내심장은 두근 거렸고, 약간은 겁이 났고, 그리고 다시 되돌아 집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웃기보다는 울상으로 그를 맞았던 기억이 있다. 학교가 끝나면 가까워서 단골처럼 들르던 압구정동 맥도날드 앞. 편하고 일상 적인 장소에서 그를 만났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었고, 모든 사람이 다 쳐다보는 것 같은 부끄러움이 밀려와서 제대로 그를 쳐다볼 수도, 내 목소리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배가 고프다며 분명히 나도 먹겠냐며 나의 의사를 묻고 그는 햄버거를 시켰고, 난 날 위해 그가 사온 햄버거엔 손도 대지 못했다. 떨리고 긴장되서 도저히 햄버거를 먹을 정신도 없었고, 그 앞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먹을 자신도 없었다. 정말 의아해 하며 왜 안먹냐고 묻는 그에게 또 나는 쌀쌀맞게 내가 햄버거나 먹으러 나온줄 아냐며 의도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쓰나미보다 더 큰 후회가 덮쳐서 머리가 띵해졌다. 내가 미쳤구나... 내 말을 듣고 표정이 좋지 않았던것도 아주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주었다. 정말 과장해서 허겁지겁 10초만에(?) 햄버거를 먹어치우고 밖으로 나왔고 내가 선물 준 케익이 꽤 컸기 때문에 맥도날드 바로 길 건너에 살던 그는 케익을 집에 놓고와도 되겠냐며 양해를 구하고는 그가 살던 아파트 앞까지 가서 날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케익을 집에 놓고 다시 나왔다. 작은 복수였는지, 아니면 생각없이 한 행동인지 모르겠지만, 나 보는데서 풍선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물론, 내게 버려도 되냐며 허락을 구했지만 내 자존심에 싫다거나 안된다고 할 수 없어서 끄덕였고 내 기분은 이미 상했다. 

그러고는 내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지금 그날을 떠올려보면 술 마신것마냥 무슨 말을 했는지 어디를 걸었는지 필름 끊긴거처럼 딱 그 부분의 기억이 한 뭉탱이가 잘려나가고 없다. 그저 가랑비같이 나도 모르게 촉촉히 젖어든 손바닥의 감촉과 옆에서 따뜻하게 전해지던 그의 체온, 그리고 옷깃이 스칠때마다, 살짝 바람이 불때마다 내가 그 몰래 숨을 크게 들이쉬며 코에 담은 담담하고 차분한 그의 향기만 기억난다. 아주 섬세하게. 눈을 감으면 바로 어제처럼 떠올릴 수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10월의 꽤 쌀쌀한 저녁이었는데도 버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나는 그의 체온이 상당히 높다는 걸 옆에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와 닿은 부분이 따뜻했다. 근데 진짜 궁금한건 그날 우리의 대화가 단 한마디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의 조작이라고 한다. 그에게 기억되는 그 날은 아마 다르겠지. 알 길이 없는 이유가 그리고 그 후로 만날 수가 없었던 이유가... 그리고 아직까지 아름답게 기억되고 추억으로 남아버린 이유는 그가 그렇게 중학교 졸업식도 하지 않은 채 다음 해 졸업 직전 겨울방학에 유학을 갔기 때문이었다. 또 한가지, 여전히 이 날만 나에게 강하게 남은 이유는 아마도 이 날이 우리의 관계가 역전되기 시작했던 계기가 된 날이었기 때문인듯 하다. ㅎㅎ

이 전까지는 그가 날 많이 좋아해 주며 발을 동동 구르는 관계였었다면, 이 날 이후로 너희는 맺어질 연은 아니다 라고 하늘에서 정한 듯 그런 사건들이 일어났다. 딱 이 날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 즈음 이후로 그 전 같지 않아진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끝이 난 것만은 아니었다. 그와의 에피소드는 대학 졸업 이후까지 이어지긴 했다. 아주 간간이. 근데도 마치 그는 내 인연이 아니라는 듯 아슬아슬하게 운명이 우리사이를 피해갔다고나 할까. 

당장 그의 생일 몇일 후 일어난 작은 사건은, 다른 반에서 내가 알지도 못했던, 이름조차 몰랐던, 그리고 전혀 부딪히거나 얼굴을 대해본 적도 없는 H라는 아이가(우린 부류가 완전히 달랐다.) 나와 사귀겠다고 공식발표(???)를 한 것이었다. 그 사건으로 참 떠들썩 했다. L은 당연히 심기가 불편했을텐데 H는 이름이 거론된 후에 알았지만, 그래도 꽤 그 부류에선 인기도 많고 잘 나가는 아이였던 것이다.

지금 떠올리니 고딩도 아닌 중딩들이 참 우습지? 나름 중딩들도 자기들 세계에서 파란만장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ㅎㅎ

중학교에도 나름 파벌이 있다.ㅋㅋㅋㅋㅋ  다들 그 점은 인정할 것이다. 난 그저 평범하고 딱히 공부를 잘하거나 돈이 많은것도 아니어서 정말 있으나 마나한 그런 부류였다. 아니, 우리가 어렸을때 절대 못살지 않았다. 오히려 운전해주시는 분도 있었고, 우리랑 놀아주는 분도 계셨고, 청소하는 분도 계셨고 그래도 잘 사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학 온 이 학교는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우리 집 재력으론 택도 없는 갑부들이 많았기 때문에 난 명함도 못내밀었다. L은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끼리 어울리는 부류. H는 돈 많은 화려한 날라리(???) 부류였다. 그 둘은 상극이었다.ㅋ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내가 왜 H와 좀 어울리려고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ㅋㅋㅋㅋㅋㅋ 여튼 H가 내게 편지를 준다며, 선물을 준다며, 할 얘기가 있다며 날 찾아오기도 했고, 불러내기도 해서 그를 마주할때면, 어김없이 L이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봤다. 아니, 평소엔 3층의 왼쪽 맨 끝 교실에 있는 L의 반에서 2층별관 옆 맨 오른쪽 끝 교실인 우리반까지 L이 올 일이 거의 없어서 콧배기도 안보여놓고 왜!! 도대체 왜!!!ㅋㅋㅋ 이럴땐 지나가냐고. 별관 옆이라서 음악실, 과학실 등을 갈 때 지나갈 수도 있지만 굳이 이쪽으로 오지 않고도 얼마든지 지나갈 수 있는데...ㅋ 뭐, L은 일부러 날 보려고 지나간 것일 수 있지만 하필 그럴때마다 H하고 있었고 오해받기 딱 쉽상이었다. 싫다는데 이놈은 왜이렇게 찾아오나..ㅋㅋ


이렇게 우리 인연은 참 아슬아슬 하긴 했다. 생일 직후에 그렇게 썰렁해진 건 아니었다. 그래도 손을 잡고 데이트 한 사이인데!! 그럴리가 없지 않아?? 그와 만났던 날은 일요일이었고, 바로 다음 날인 월요일도 날이 꽤 쌀쌀했었다. 그의 반에 꼬마 하나가(그보다 키가 작았다. 그래서 꼬마라고 부른 기억이ㅋㅋ) 우리 반으로 찾아와서 날 찾았다. 넌 누군데...? 그는 L의 심부름으로 왔다며 베이지색의 두껍지 않은 톱코트(Top coat)를 내밀었다. 


날씨가 추워서 감기 걸릴 수 있으니 이거 입고 있으래~ 애들이 또 우리 L 놀릴까봐 조용히 왔어.


난 귀에 입이 걸렸고 집에 가기 전까지 그의 코트를 덮었다 끌어안았다 채취를 맡아봤다 난리를 쳤다. 이 이후로 몇번 더 그는 옷을 보냈고 어떤 날은 내가 옷 달라고 뻔뻔하게 요구하는 날도 있었지만, 여전히 너무 웃긴건 우린 서로 대면해서 말을 안했다... 바보.. 2년동안 그하고 했던 대화는 거의 없다고 봐야했다.ㅋㅋ 아 정말 바보같다. 지금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그는 내가 이렇게까지 그를 좋아했었던 것도 내마음이 애틋했던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고, 외로운 첫사랑을 했을 것이란 생각에 약간 미안하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이렇게 약간은 알콩달콩한 기억도 있지만, H의 등장을 시작으로 우리 사이가 아슬아슬하게 엇갈렸던 기억이 더 많고...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 공식을 성립시켰으니 유독 그가 기억에 더 오래 남는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잠시 한국에 나온 그와 연락이 닿은게 그의 출국 당일 비행기시간 3시간 전이어서 못만났었고, 짧은 통화만 했었고. 대학 시절 어렵게 날 찾아낸 L의 미국 친구는 내 생일을 기억한 L에게서 선물을 전해주려고 들고 나왔는데, 내가 영국으로 떠난지 일주일 넘게 지났다는 걸 알아냈었고. 사회에 나와서도 그와 연락하고 지낸다는 중학교 시절 L의 친구를 어렵게 찾아냈는데, 그 L의 친구가 또 유학을 갔고 내가 남긴 내 연락처가 너무 늦게 전달되는 바람에 난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영구출국한 상태였었다. 이런 것도 나중에 전해듣고 알게되고 하면서 허무한 웃음만 나더라.

제일 최근의 기억은 카자흐스탄에서 막 귀국하고 첫 반창회에서 본 기억이다. 나가고 보니, 아이들이 나보고 계탔다고 오늘 L나온다고 해서 진짜 뒤통수가 찡 하게 아프고 미리 말 안해줬다고 아이들에게 버럭하곤, 허겁지겁 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친다며 떡칠을 하고 나왔던 기억이 ㅎㅎㅎ.. 그 작았던 아이가 키가 180cm가 넘게 컸고 덩치도 외소하기만 했던 아이가 미식축구를 해서 무슨 운동선수 같아져서 그 생소한 모습에 더 서먹하고 아주 약간은 서운했다. 기가막힌건 난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말도 못했었다. 그가 먼저 많이 변했다며 잠시 한국 들어왔는데 출국전에 한번 보자고 전화번호를 주었다. 그날도 술자리 마치며 그가 아주 작게 다른 아이들 몰래(여전히ㅎ 부끄럼이 많은지 예전처럼 다른아이들 몰래...;;;) 커피한잔 하자고 했지만, 내가 밖에서 눈치를 보는 사이 술 좋아하는 한놈이 한잔 더 하자고 그를 낚아 채 갔다. 정말 서운함 보다는 피식 웃음이 났다. 진짜 엇갈릴 운명이었나보다. 우린. 결국 일이 겹치고 꼬이고 해서 그의 출국전에 다시 보지 못했고 그 후로 지금까지 그를 다신 못봤다. 그렇게 그는 나에게 미스테리하고, 플라토닉한 첫사랑으로 남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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