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exandra the Twinkling Aug 08. 2016

자유로운 시절 일기 16

악몽 그 이후. 영국편. 이제는 어른.

그저 시시콜콜한 영국 생활 이야기.


24시간보다 더 더 길게 느껴졌던 악몽 같았던 한나절. 그 사건이 불행만은 아니었다. 왜냐고?

그 이후였던 것 같거든.

더 이상 소심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된 건. 전혀 소심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전에는 남들 앞에 서는 것이 힘들었고, 그저 조용히 남들 뒤에 숨어 있는 것이 편했었지. 하나하나는 모두 친구였고 편했지만, 모여있으면 그들 앞은 내가 설 자리가 아니었다. 옷 하나를 입어도 열두번도 더 생각하고 남들에게 비춰질 이미지를 떠올렸다.

무엇이 날 그렇게 달라지게 한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전반적으로 사소한 고민거리들이 더 이상 고민하기엔 우스운 것들로 변해 있었고, 남들 눈을 덜 의식하게 된 것 같다. 왠지 기분은 그동안 엄마의 지나친 관심과 걱정이 내 주변에 쉴드를 치고 있었다면, 엄마가 없는 타지에서의 위험이 그 쉴드를 깨버렸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난 그 무서운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에도 엄마가 걱정하던 것, 엄마가 하지 말라던 것들을 떠올렸으니까... 세상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극성스럽고 소위 'control freak 엄마'라는 지붕 아래서 지내왔다면, 그런 내 어린 시절은 그날로 끝이 났고.. 울타리를 열고 나와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내 행동이나 처신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깨달은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이젠 더 이상 엄마가 무서워서 화장을 못 하는 것이 아니고, 엄마한테 혼날까 봐 깊게 파진 옷을 못 입는 것이 아니고, 엄마의 화난 얼굴이 떠올라서 집에 일찍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말도 통하지 않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내편이 없는 나라였기 때문에 한번 최악의 사건을 겪어본 나로서는 그 모든걸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두려움을 이미 알고 있었고,  충분히 나니처럼 까불고 노는 걸 택할 순 없었다.내 모든 행동과 옷차림은 내가 책임질 수 있어야 했다. 덤벙거리고 잘 잃어버리고 잘 흘리고 다녀서 내 준비물, 내 도시락, 내 숙제를 해주어야 했고, 갖다 주어야 했던 게 엄마가 기억하는 너무나 당연한 내 모습이었지만, 타지에서의 큰 사건과 그 후의 생활은 내 물건, 내 스케줄 잘 챙기고, 선을 그을 줄 알고, 헤프지 않게 노는 법을 터득하게 했고, 난 참  많이 변했다.


겉으로 보인 가장 큰 달라진 점은 당연히 스타일이었다. 너무 어색하기만 했고 하면 엄마 눈치 보이고 부끄러울 것 같았던 진한 화장이 해보고 싶어서 제대로 배웠고, 제법 대범해져서 머리도 염색하고, 액세서리도 작고 이쁜 것보단 크고 튀는 스타일로 바꾼 것? 사진을 보면 확 티가 나더라. 내 평생의 스타일은, 영국 가기 전과 다녀온 후로 나뉜다. 그래서 여전히 엄마는 내가 영국을 간 후로 심하게 망가졌다며 괜히 보냈다고 투덜거리신다. 전엔 항상 검은 머리를 스트레이트 단발 또는 포니테일로 묶고 다니는 게 다였고, 변화를 줘 봤자 앞머리를 내리거나 세우거나.. 정도였고. 옷은 주로 클래식한 스타일이었고 멋을 내봤자 무채색 일색이었다. 영국에서 귀국하던 날, 날 거의 알아보지 못한 엄마는 입을 벌린 채로 어안이 벙벙해서 공항을 나설 때까지 말을 안하셨었지... 돌아오던 날 내 머리는 거의 하얀 하이라이트를 준 애쉬 블론드 색 염색에 짧고 곱슬곱슬한 헤어스타일에 레깅스와 알록달록한 타이트하고 짧은 상의 차림이었다.


나의 변화는 주변에서보였는가 보다. 항상 조용하게 수업이 끝나면 존재감 없이 집으로 돌아가서 TV를 보며 숙제를 했었는데.. 이젠 제법 화려하고 세련된 친구들도 만나게 되었고, 내 주변엔 일본인 상류층과 오스트리안, 스페인 친구들이 몰렸다. 따라다니는 외국인 친구들도 생겼다. 방과 후엔 외국 아이들과 삼삼오오 몰려서 돌아가면서 자국에서 유명하다고 소문난 런던의 맛집도 찾으러 다니고, 술도 못 마시면서 Pub도 쫓아다니고 런던 센트럴에서 슬롯머신도 땡겼고, 뮤지컬도 보러 다니며 늦게 귀가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제일 큰 건 난생처음으로 나 혼자 내 의지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내 손으로 돈을 벌었다는 것. 그 전엔 용기가 없어서 못했을 법한 행동이었다. 내 생활이 많은 부분이 내 의지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오빠 친구네 집에서 사는 것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학교에 home stay 신청을 했고, 영국 이주 그리스인 가정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영국식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더 이상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생활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친구들은 웃으며 얘기했다. 이때부터 party girl이 되었다고 ㅎㅎ..


제일 잘 어울려 다닌 친구들은 일본인 상류층 아이들이었다. 학교에서도 막 놀고 문란하게 생활하는 일본인 부류와 선을 긋고 유럽인 하고만 교류하며 공부를 잘하는 엘리트 한 일본인 부류가 있었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어도 하게 되었다. SDA일본어학원을 한국 있을 때 3개월간 다닌 적이 있어서 어렵지 않았다. 워낙 남은 기간을 붙어 다녀서 여전히 이름도 다 기억한다. 일본 7대 명문대에 다니는 신따로. 항상 성격과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았다. 나는 잘 모르지만 촌스러운 이름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도쿄 출신으로 조용하고 부끄럼을 타며 키 크고 단정한 잘 자란 아들 느낌? 더플코트와 니트 베스트를 너무 좋아해서 진짜 소심한 마마보이 같긴 했다.ㅎㅎㅎ 신따로가 놀림받을 때마다 살짝 같이 놀리지만 그래도 편을 들어주는 같은 도쿄 출신 야에꼬. 야에꼬는 진짜 부자였는지 항상 헤롯즈에가서 쇼핑을 하고 단 하루도 흐트러짐 없는 단정하게 세팅한 머리스타일에 머리띠를 했고, 영국 보딩스쿨 학생들처럼 체크무늬 스커트를 색색깔로 매일 바꿔 입는 세련된 엘리트였다. 막내였던 날 젤 귀여워하고 일어를 매번 가르쳐주고 너무나 잘 웃던 준꼬. 아이들 중 가장 날라리(?) 스타일이었던 호탕하고 이쁘고 통통한, 그렇지만 제일 섹시한 맏언니였다. 부류에 상관없이 학교 내에서 거의 모든 일본인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디 출신인지 도시명은 까먹었지만 삿포로 근처라고 말했던 것만 기억한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료오지! 오사카 출신이라서 자신의 성격은 거의 한국사람이라고 항상 나한테 자랑하듯이 말했다. 신따로를 놀리기 시작했고, 항상 도쿄 출신인 것을 놀리는 것을 재미있어했다. 약간 어깨 넓은 조세호 같은 느낌?ㅎㅎㅎ 약간 통통했지만 너무너무 옷을 잘 입고 제일 재미있고 멋있었다. 내게 오사카 사투리를 가르쳐주기 시작하면 아이들도 다 따라 웃으면서 신따로도 도인과 오사카인의 차이점을 보여준다고 동참하며 말투와 몸짓으로 웃겨주었다. 눈이 엄청 크고 바가지 머리를 하고 다니며 스키니진만 입고 다니던 중성적인 매력의 무뚝뚝한 아이. 같은 반이었는데도 그리고 제일 반에서 친했는데도 무뚝뚝해서 오히려 다른 반의 신따로, 야에꼬, 준꼬, 료오지보다 말을 많이 안 해봤다.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젓가락처럼 마르고 커다란 쌍꺼풀을 가진 나오꼬. 성격도 천상 여자였고 유쾌하게 어울리지는 못하더라. 테츠야와 토모꼬는 동거 커플이어서 우리하고 잘 어울리지 않았지만, 나름 정기적인 모임(??)에는 나왔다. 아마 테츠야는 내가 아는 일본인들 중 가장 잘생겼던 것 같다. 요즘 말하는 소위 만찢남이었다. ㅎㅎ그 외에 학교에 일본인이 엄청 많았지만, 나머지는 자기들 끼리끼리 어울렸고 나와 어울리는 일본 아이들을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중산층 아이들이었다.


무작정 일본에 대한 반감으로 일본인 하고는 잘 인사도 안 하고 지냈었고, 독일 아이들은 동양인을 무시해서 자기들이 인사를 안 했었고, 그 외 유럽인들은 내가 부끄럼을 많이 타딱 우리반 아이들하고만 인사만 하고 지냈고, 중국인은 대부분이 무시를 했었고... 그러니 친구가 없었던 내가, 그 사건 이후로 낮엔 일본 아이들과 주로 어울려 다녔고, 저녁엔 스위스, 오스트리아, 스페인, 스웨덴 아이들과 놀러 다녔다.

방학을 이용해서 일본인 아이들과 차를 빌려서 웨일스로 여행도 다녀왔다. 가는 내내 끝없이 펼쳐지는 들판에 내려서 뛰어다니며 사진도 찍고, 어마어마한 양 떼를 쫓아다니기도 했다. 양 떼들마다 털에 파랑 보라 초록으로 색칠이 되어있어서 가다 멈춰서 물어보니 자기네 양 떼를 표시해놓은 거라고 하더라. 너무 단순해서 얼마나 웃었는지. 스완지에 도착해서 건물이 너무 이뻐서 여기서 묵자고 inn 이란 간판만 보고 불쑥 들어갔는데 front desk가 나올 거라고 예상한 우리들을 모두 멈춰 서게 만들었다. ㅎㅎ 헐, 들어가자마자 사람이 북적북적 거리는 old pub이야;; 정말 옛날 식으로 1층 술집, 2층 여인숙인 거다. 정말 진짜 여기 머물고 싶었는데. 여하튼, 사람들이 아무리 토요일이지만 대낮부터 북적대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바텐더 앞에 앉아서 말을 걸자, 바텐더가 어마어마한 사투리를 쓰며 ㅋㅋㅋㅋ 알아듣기 힘든 영어를 했다... 솔직히 난 다 못 알아들었는데 역시나 영국서 제일 오래 산 료오지가 알아듣고는 까르르 웃으며 나가자고 한다. 왜? 왜? 왜? 이러며 동그란 눈을 뜨고 묻는데 바텐더가 눈치를 챘는지, naughty english! naughty english! 하면서 수건을 휘휘 젓는다. 나와서 료오지가 하는 말이, 우리 악센트가 런던 악센트라서 가뜩이나 잉글랜드 사람을 싫어하는 웨일스 사람들이 듣기 거북해 하는데, 잉글랜드에서도 그중 제일 간사한 놈들이 런던 놈들이라며 나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눈물을 머금고 우린 그냥 평범한 호텔로 갈 수밖에 없었다. 시골 농장에서 밥 얻어먹는 로망을 품었으나.. 정작 그 시골은 잉글랜드 사람들을 대부분 좋아하지 않더라 ㅠㅠ

또 한 번은 오스트리아 남자애가 너무나 따라다녀서 핑계를 댄다는 게 오빠가 허락하지 않고 통금이 있고... 어쩌고 는 말도 안 되는 한국식 이유를 댔다가 너의 인생인데 왜 오빠가 네가 만나는 사람까지 통제를 하고, 네가 가고 싶은 곳도 마음대로 못 가게 놔두냐며 엄청 오랫동안 충고를 듣다가 너무 피곤해서 만나자고 허락을 한 적도 있다..ㅎㅎ;; '너는 내 취향이 아니야'라고 하면 대답을 너무 길게 하고, 별별 이유를 대며 말을 너무 잘하는 이 놈 떼어놓으려고 고민하는 날 보고, 토모꼬가 큰 아량을 베풀어주어서(??ㅋㅋㅋ) 만찢남이었던 토모꼬의 남친 테츠야가 손수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날 끌어안고 스킨십을 한다거나 키가 너무 커서 앉아서 내 볼에 뽀뽀를 해준다거나 하는 가슴이 둑흔둑흔 거리는 이벤트도 해주었다. 아.. 토모꼬만 없었어도 테츠야하고 키스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ㅠㅠ 얼마나 아쉽던지 ㅎㅎㅎ 결국엔 오스트리아 아이를 떼어놓는데 성공은 했지만, 그놈이 테츠야와 놀아나는(??) 내게 너무 화가 나서ㅎㅎㅎ 학교에 내가 바람둥이라고 소문을 퍼뜨리고 욕을 해대는 후폭풍이 ㅠㅠ;;


그놈 덕분에 사실 좋은 일도 후에 생기긴 했다. ㅋ.ㅋ

오스트리아 친구의 노이즈 마케팅 덕분에 학교에서 조금 알려졌다고나 할까...

영국 생활이 소소하고 재미있고 즐거웠던 것도 역시 어느 정도 외향적으로 내가 변해서였다. 그대로 소심한 마마걸이었다면, 난 그 긴 긴 시간 동안을 영국에서 보내면서도 영국이란 곳을 즐기지 못하고, 학교나 다니고 영어공부나 하고 그게 영국이던, 한국이던 변함없는 그런 생활을 하고 돌아왔을지도 모르겠다.



.......




 


매거진의 이전글 자유로운 시절 일기 1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