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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andra the Twinkling Jul 04. 2016

자유로운 시절 일기 15

카자흐스탄에서의 첫 생일

카자흐스탄에 오자마자 그다음 주에 생일을 맞았다.

고딩시절 이후에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던 아빠와 재회를 하고, 아빠를 만난 지 한 달도 채 안되어 아빠가 사는 나라로 날아왔다. 뭔가 드라마틱하지만 이곳까지 오게 만든 이미 잿더미가 돼버린 내 불같은 사랑 때문에 내 맘은 어두컴컴하고 울적할 수밖에 없었다. 헤어진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해 볼 엄두도 나지 않고, 연락은 더더군다나 할 수 없었다. 그때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도 없었고, 소식을 엿볼 수 있는 방법은 싸이월드가 유일했다. 거기다가 우리나라엔 그때 즈음 케이블 모뎀이다, 광케이블이다 머 그런 것들이 나왔지만 카자흐스탄은 여전히 전화 모뎀이었다는 거.ㅋㅋㅋ 싸이월드.... 보는 게 불가능이다. 첫 페이지도 로딩이 안된다.ㅋ 책도 손에 안 잡히고 공부는 말할 것도 없었고 그때 나는 지나간 사진들이나 뒤적거리고 내가 했던 잘못을 곱씹으면서 방에 처박혀서 책을 든 채 멍 때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아빠 회사에 같이 나간 날도 회사 밖으로 나와서 1층 건물 입구 길거리에 걸터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구경하고 먼산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탐탁지 않다. 이가 안 맞는 것 같다.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이런 허전하면서도 뭔가 잘못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계속되었다. 서울에 있었어야 헤어진 그 사람하고 뭔가 매듭을 지을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커지면서 카자흐스탄에 온 게 후회가 되었다. 우린 정말 딱히 헤어진 게 아니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질투가 심했던 남자친구는 내가 다른 남자의 차를 타는걸 죽기보다 싫어했었고, 대형견을 두 마리나 혼자 키우는 나로서는 자취를 하던 신반포에서 동물병원이 있는 구반포까지 대중교통을 타는 건 불가능했고 택시도 대형견과 함께는 절대 태워주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타지 않으면 꽤 먼 거리를 걸어 다녀야 했었다. 가끔 같은 동호회에 속한 같은 동물병원을 다니는 분들을 만나면 그분들도 자신들도 겪는 일이니까 내 고충을 잘 알고 태워다 주곤 하셨다. 나도 눈치가 있지, 싱글 남자의 차는 타지도 않았고 부부 동호회 분들을 만나면 감사히 차를 얻어 탄 거였는데.. 그런데도 그렇게 지독히 질투를 하더라...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퇴근을 하고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개 두 마리와 함께 구반포까지 걸어갔다가 걸어 돌아오려면 육체적으로 너무 힘이 드는데 굳이 그걸 걸어돌아오라니...

헤어지게 된 날도 부부 동호회분의 차를 타고 오고 있었고, 퇴근 후 우리 집에 들러서 날 보려고 한 남자친구는 내가 그 차에 타고 있는걸 목격하곤 우리 집으로 오지 않고 바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었다고 한다. 난 또 싸움이 날 거란 사실을 예감했고, 매번 그런 사실이 지긋지긋했다. 역시나 밤에 전화가 왔고 싸움이 시작됐다. 나도 그랬지만, 남자친구도 작정을 한 듯하다. 결국 우리 집에 가져다 놓은 자기 물건들을 다 돌려달라고 하며 내 얼굴을 보기 싫으니 문 앞에 꺼내놓으라고, 자기가 찾으러 갈 거라고 했다. 나 역시 지쳐서 몇 개 안 되는 남자친구의 물건들을 상자에 넣어 문 밖으로 내놓았고 잠이 들었다. 그 상태에서 어떻게 잠이 왔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나의 일과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개들이 볼일을 볼 수 있도록, 볼일을 볼 때까지 아침 산책을 한 후에 출근을 해야 하고, 퇴근 후에도 똑같이 개들이 하루 종일 기다렸을 테니 서둘러서 산책을 해야 했고, 정기적으로 산책 후에 동물병원까지 왕복을 걸어서 다녀와야 했기 때문에 정말 매일이 피곤했었다.

새벽녘에 전화소리에 잠을 깼다. 엄청 술에 취해있다. 뭐라고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공중전화라고. 전화기 망가졌다고. 나오라고. 그러다 끊어졌다. 조금 있다가 음성메시지가 왔다. 역시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잡음이 심하고 목소리가 끊긴다. 마지막이라고. 나오라고. 안 나오면 이대로 끝내는 걸로 알겠다고. 자기는 지금 어디에 있다고. 안 들린다. 어디라는 건지. 전혀 못 알아듣겠다.

우린 그렇게 끝이 난 거였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 내내 울적하고 툭하면 울다가 주말에 썰매개 동호회에서 대회를 나가기 위한 연습으로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모인다길래 힘을 좀 내려고 나갔다. 전화기가 울렸는데 받으니까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끊어진다. 누군지 뻔한데 다시 걸어보니 전화를 받지 않는다. 또 일주일이 지났다. 회사에 있는데 웬일로 네이트온으로 대화를 걸어온다.

'목소리 들으니 너무 잘 사는 것 같네. 걱정 안 해도 되겠다. 난 그래도 엄청 걱정했는데, 넌 나랑 싸우고 헤어져도 5분만 지나면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이었잖아. 동호회도 나가고 즐겁게 사는 것 같네... 난 너무너무 힘들었는데. 넌 아닌것 같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처음으로 내가 다 잘못했다고 그랬다. 보고 싶다고. 그랬더니 한 달 후에 보자고 한다. 한 달 후에도 서로 그렇게 보고 싶으면 그때 결정하자고. 한 달을 기다리기 힘들었다. 근데 한 달도 지나기 전에 아니, 1주도 채 지나기 전에 동창 친구가 얘기해주더라. 그놈 만나는 여자 있다고.ㅎ 그래서,,, 한 달을 기다릴 것도 없이 난 무너져 내렸고, 회사에서도 계속 눈물이 나와서 일을 할 수가 없어 사표를 쓰고 아빠에게 SOS를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빠한테 가면 나랑 인연을 끊겠다며 울고 소리치는 엄마에게도 의논 아닌 통보를 하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왜 한 달을 언급한 건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렇게 찝찝하고 석연치 않게 끝을 맺은 것도 성에 차지 않는다. 인생의 반 이상을 살았다고, 알만큼 인생사를 아는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지금에도 여전히 이해 안 되고 여전히 성숙하지 못한 그 끝맺음이 불만이다. 온 가슴이 찢어지는 경험을 한 것도 처음이었고, 죽을힘을 다해서 매달려 보고 싶었던 것도 처음이었다. 내가 잘못했으니 다 고치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 당시엔 매일매일 우리가 처음 만난 날부터 헤어지는 날까지를 내 머릿속 비디오로 돌려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고, 또 해야 할 일이었다.

아빠는 매일매일 바닥만 보며 걸어 다니고 툭하면 한숨을 내쉬고 힘없이 거무죽죽 시커먼 표정으로 다니는 날 보면서 안쓰러웠는가 보다. 생일 파티를 성대하게 해준다고 한다.

아빠의 현지 부인께서 하시는 식당을 통째로 빌리셨다. 고려인 인민배우(??) 출 발레리나, 무용수, 가수, 극단 배우들이 모두 왔고 아빠 회사 직원들도 모두 왔다. 새엄마는 메뉴에도 없는 음식들을 해주셨다. 보드카와 샴페인 그리고 시바스리갈 12년, 발렌타인 17년, 로열살루트 21년을 선물이라고 내놓으셨다.ㅋ 순간 진짜 빵 터졌다. 아빠가 딸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 술이라니;; 우리 아빠,,,, 날 아는 걸까? 순간 약간 무서웠다. 내 뒷조사를 한 걸까ㅋㅋㅋ 물론, 아빠는 가오가 중요한 분이라서 딸 생일에 다들 같이 마시라고 내놓는 술이 아주 떨어지는 건 싫으셨던 거라는 건 잘 알겠는데.. 나도 순간 이성을 잃고 로열살루트를 끌어안고 이건 내 거야, 나만 마실 꺼야 라고... 하아.. 정말 이성을 잃었었던 거다. 아빠의 눈빛이 이상해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거짓말 조금 더 보태서 30분 만에 한 병을 혼자 다 마셨다. 그 후론 너무 뻔한 전개인데 ㅋㅋㅋ 뭐가 뭔지 모르고 다 마셨다.ㅋㅋ 정말 태어나서 제일 많은 양의 술을 마신 날이지 않을까. 후.. 마지막 샴페인을 마시면 안 되는 거였는데.. 위스키를 마시다가 코냑을 마시다가 보드카를 마시다가 샴페인을 마지막으로 마시고는 마지막으로 잡고 있던 이성의 뚜껑이 날아간 듯하다.

보통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그러니까 CIS 지역 사람들은 앉은자리에서 모든 걸 끝내는 술자리를 가진다. 우리처럼 1차, 2차, 3차 돌아다니는 게 아니고, 한 곳에서 밥 먹고, 술 먹고, 노래하고, 춤추고를 모두 끝낸다. 자연히 러시아나 카자흐스탄의 대부분 모든 식당은 밤 9시가 넘어가면 라이브 카페로 바뀌고 스테이지는 항상 있어서 9시 이후에는 가수가 노래를 하고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춤을 추는 게 당연하다. 그렇지만 난 한국에서 갓 날아온 따끈따끈한 서울 촌년, 2차를 외쳤다. ㅋㅋㅋ 아빠는 너무 당황해서 말리고 꾸짖고 잔소리하고 그러나, 꿋꿋하게 난 2차를 고집했다.ㅋㅋㅋ 진짜 제정신 아니었나 보다.

'아빤 여기서 나이 많은 사람들하고 여기 식대로 놀아~ 난 젊은 애들하고 2차 갈게'

ㅋㅋㅋㅋㅋㅋ 내가 미쳤어... 아빠는 지금까지도 그때를 곱씹으신다.ㅋㅋㅋ 어이없고 기가 막히고 부끄러우셨다며... 한번 더 remind 하자면, 난 아빠와 고1 때 헤어지고 다시 만난 지 한 달 된 사이였는데 말이지...

나의 고딩시절밖에 기억에 없으신 아빠는 그때에서 기억이 멈추신 듯  여전히 아직까지도 나를 고딩 꼬마 취급하는데 그 날 제대로 충격받으셨던 듯하다.

젊은 사람들은 우르르 다 이끌고 꼭뜌베로 갔다. 우리나라의 남산 같은 곳. 여전히 미스터리인 건 봉고 같은 큰 차로 다 같이 갔는데 대체 운전은 누가 했었지? 다 같이 술 마셨는데 ㅋㅋ

Коктюбе 꼭뜌베에서 내려다 보는 야경


역시나 여기서도 술 마시고 춤추고 소리 지른 기억뿐이다.ㅋㅋㅋ 그리곤 필름 끊겼다.ㅋ

희미한 기억은 집 앞에서 아빠한테 '아빠 안녕 나 왔어. 오늘 덕분에 즐거웠어'라고 내뱉은 실언ㅋㅋㅋㅋㅋㅋ

Дмитри(드미트리-디마)가 날 업고 집까지 계단을 올라와서 데려다줬다고 한다.

약삭빠르고 영리하고 눈치백단인 디마 이놈, 이날 아빠한테도 나한테도 점수를 얻었다. 훗날 몇 년 후에 알게 되었다. 이놈의 계획이 내가 카자흐스탄에 온 첫날부터 시작되었었단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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