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만세
똥똥이는 애초에 문열이로 태어나서 냥이 엄마가 그루밍도 거의 안 해주고 사랑을 별로 못 받아서, 따뜻하게 안아주고 먹여주는 사람한테 금방 애착도 보이고 사람을 철석같이 믿지만 땅콩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어. 커다란 사람이 겁도 나고, 공기청정기 돌아가는 소리도 무섭고, 땅콩을 안아 올리려고 두 팔 벌리고 다가오는 사람을 보면 움찔하며 도망가고, 물건이 탁 소리 내며 떨어지면 1초 만에 꼬릴 감추고 숨어버리고, 진공청소기 소리엔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곳을 찾아 등반을 하고, 장난을 치자고 흔들어대는 인형을 보고도 놀래서 줄행랑을 치기 일쑤였지. 혼자 놔두면 그냥 마냥 잘 놀고 지 형제 냥이 괴롭히고 장난을 치다가 사람이 나타나면 긴장을 하는 ㅎㅎ
근데 아주 좁은 화장실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붙어있고 작은 방에서 같이 뒹굴고 자고 하면서 사람한테 골골골 송도 불러주고 사람 손을 물면서 장난도 치고 지나가는 사람 발에 매달리기도 하는 아주 조금 용감한(?) 냥이가 되었지 ㅋㅋㅋ 하지만 역시나 아직은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아님 밖에서 소리가 들릴 때마다 조금씩 움찔거리기도 하고... 그러더니 현실과 타협한 자세를 개발했어!!! 바로 만세!!!
이제 땅콩은 별명이 만세냥이야. 무서워도 만세, 재밌어도 만세, 장난칠 때도 만세, 쫄아도 만세 ㅎㅎㅎ 안아 올리려고 두 손 벌리고 다가가도 만세를 하고, 장난감을 흔들어도, 진공청소기가 지나가도, 옆에 뭐가 떨어져도, 눈 앞에 뭔가가 다가와도, 숨어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의 다리를 보고도 일단 만세를 하고 보는 거지 ㅋㅋㅋ
처음엔 만세 하는 게 그냥 신기하고 웃겼는데.. 만세에 집중하는 표정을 보니 ㅋㅋㅋㅋㅋㅋㅋㅋ 자꾸만 시켜보고 싶어서;;
어떻게 해서든 만세를 시켜보려고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장난감을 흔들고 ㅋㅋㅋㅋ
아마 이 영상이 땅콩의 인생만세영상이 아닐까... 한 가지 비밀이 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 땅콩은 열 받으면 온 몸이 핑크색이 돼버려ㅋㅋㅋ 땅콩 만나기 전에 하얀 불테리어 키우는 아는 언니네 멍멍이가 열 받아서 화가 나면 온 몸이 핑크색이 되는 걸 보고 엄청 웃으면서 계속 열 받게 하려고 했었던 기억이 있는데... 흰 단모종 애들은 다 그러지 않을까 싶네. 이게 그렇게 귀여울 줄이야 ㅋㅋㅋ
이젠 제법 둘이서 이 방을 점령했다고 생각하는지 엄청나게 뛰고 까불고 바스락 대는 거, 움직이는 거 하나도 놓치질 않네. 덕분에 난 낮에도 못 자고 밤에도 못 자고; 이젠 초저녁에 자기로 했어. 낮에 온 에너지를 다 쏟아붓도록 놀게 만들어서 초저녁에 잠깐 애들하고 뒹굴며 자고, 또 해 떨어질 무렵에 열심히 놀고 화장실로 들여보내서 밤새 푹 자도록 =_ =a
아,, 지들끼리 신문지 갖고 잘 놀다가 왜 나를 공격하는 거냐고!!! 왜 기어올라 오는 건데!!! 두꺼운 옷 안 입었단 말이닷!! 아고 아퍼라... 이 말썽쟁이들ㅠㅠ 진짜 살에 빨간 점이 무수히 알알이 박혀있는 사진을 찍어놨으나... 허연 살 사진은 누군가에겐 혐오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ㅋㅋ
잘 먹고, 잘 놀고, 잘 싸주는 아가들한테 감사하다. 적어도 우리 집에 있는 동안은 건강하고 이대로 무난하게 쑥쑥 자라주면 좋겠어. 약속했던 기간도 거의 끝나가고. 얼마 안 있으면 아가들 하고도 헤어져야겠지. 싱숭생숭하게. 오랜 기간은 아니지만 아가들은 충분히 나에게 포근함, 책임감, 행복감을 가져다 줬어.
요 꼬물꼬물 조그만 것들이 뭐라고 ㅎㅎㅎ 내가 만약에 임신을 해서 내 아기가 생기게 된다면, 태어나자마자부터 꼭 동물하고 같이 살게 할거야. 통계상 아가들도 애완동물과 함께 사는 게 면역력에도 좋고, 심리적으로도 좋다고 하잖아. 실제로도 나와 내동생은 어린 시절 동물을 키우면서 댓가를 기대하지 않는 사랑도 배웠고, 책임감도 배우면서 남들이 말하는 소위 결손가정에서 어두운 학생 시절을 어둡지만은 않게 지냈거든.
가정이 어려운 시기였을 때에도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으러 식구들이 피곤함도 모르고 온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찾았을 때 엄청나게 기뻐했던 기억의 조각도 남아있고, 이모댁의 강아지가 낳은 아기 강쥐를 데리고 집에 와야 하는데 그 어릴 적에 택시를 탈 수 없어서 버스를 타고 오다가 들켜서 혼나고는,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서 강쥐와 함께 남은 거리를 열심히 같이 뛰어오며 첫 교감을 나누었던 기억 조각도 있고, 강쥐가 그리고 냥이가 천수를 누리고 가는 마지막 길도 지켜줬던 조각도 있고, 더 어릴적엔 학교앞에서 사온 병아리가 닭이 될 때까지 이름을 붙여주고 키우다가 베란다를 통해 날아가던걸 봤던 조각도 있어. 생각하면 그런 따뜻한 기억과 경험들 때문에 우리 남매는 참 바람직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았던가 싶어. 나쁜짓을 하거나 늦게 올 수가 없었던 거지. 빨리 집에가서 아가들 밥을 챙겨줘야 했고, 산책을 시켜야했고, 모래를 갈아줘야 했거든. 동물을 키우고 싶으면 책임을 지라는 부모님의 엄명과 그 책임감 덕분에 짜증나고 싫었을 때도 당연히 많았지만 그런 나쁜 순간은 전혀 기억에 남아있지 않아. 참 신기한 존재인것 같아.
이 아가들과의 묘연(猫緣)은 어디까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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