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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andra the Twinkling Oct 18. 2015

자유로운 시절 일기 05

치맛바람은 좋은 바람?

마마보이 아닌 마마걸


요즘 좋은 세미나들이 부쩍 많아졌다. 어느 세미나에서인가 들은 이야기이다.

여자가 집에 있으면 넘치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처음엔 남편을 잡고, 아이들이 생기면 아이들을 잡고, 그 아이들이 크면 자신을 잡는다.

우리 엄마 얘기인걸?

치맛바람이 유행도 하기 훨씬 전인 나 어릴 적 이미 엄마는 치맛바람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었다.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면 유치원으로 일주일에 한번씩 출근도장 찍으셨고 초등학교에 가서도 엄마를 학교에서 만나는 건 별일도 아니었다.

나의 첫 사교육은 아마 그림 미술 유아원을 갔던 3살에 시작되었지 싶다. 4살에는 영어회화와 미술, 피아노를 시작했고 5살부터는 아침부터 해 떨어질 때까지, 초등학교 들어가서도, 중학교 다니면서도 항상 해가 어둑어둑해져야 집에 올 수 있었다. 덕분에 배운건 많았다. 그림, 서예, 도예, 피아노, 플륫, 성악, 기억법, 속독법, 주산암산, 기계체조, 고전무용, 수영, 영어 등등.. 등등? 이것보다 더 있다고? 쓰기 약간 부끄러운 것들이 더 있다.ㅋ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도 항상 엄마의 입김으로 반장을 했고, 졸업할 때에는 졸업생 대표로 단상 위에 올라가서 우등상을 받았었다.

뭐,  그중 100% 모두 나쁜 건 아니었고 아주 약간의 이득도 있긴 했다. 모두들 그 시절 한번씩의 경험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교사의 성추행! 그건 아마 지금 떠올려보니 예전 우리 어린 시절에  비일비재했을 것 같다. 그런 일을 그다지 겪지 않은 이유는 엄마의 치맛바람 덕분인 것 같다. 초등학교 때 새로 온 전학생이 성추행으로 고생했었고,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통통한 부반장도  고통스러워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중학교에 가면서 엄마의 치맛바람은 점점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한참 유행이었던 8학군으로 전학 가기를 나도 엄마의 극성 덕분에 겪었다. 전학을 간 후론 엄마를 더 자주 학교에서 볼 수 있었다. 그곳은 나도 느낄 정도로 그런 일들이 심하게 일어나고 있었고, 모두들 쉬쉬하지 않고 당연하고 학생 평가의 기준이 되고 있었다.

강남으로 전학을 가자마자 소위 8학군에 왔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험한 사건이 있었다.

여자들이라면 머리에 성능 좋은 스프레이로 고정시킨 부채를 하나씩 달고 다녔던 시절이었다. 나도 가운데 가르마를 타고 앞머리를 양쪽으로 힘을 주고 다녔다. 담임이 2학년 올라간  둘째 날, 교무실로 내려오라고 하더라. 내려갔더니 담임은 다짜고짜 눈에 불이 번쩍 나도록 머리통에 싸다구를 날려 주셨다. 내 이마 위에 달린 부채를 마구 헝클어 뜨리며 내 머리통을 흔들기도 하셨다.

내일부터 이 머리 안 풀고 오면 전교생이 보도록 니 머리 끄댕이를 잡아서 복도를 질질 끌고 다니겠다

그래도 순진했던 나에겐 엄청난 충격이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너무 무섭고 서러워서 눈물도 안 났다. 새 학교로 온지 얼마 안되었는데 앞으로의 학교 생활이 너무 두려웠다. 먼저 학교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고민 고민을 하다가 엄마에게 고자질을 했다. 그때 만큼 엄마의 치맛바람이 간절했던 적이 없었다. 무언가 엄마가 해결해 주기만을 바라며... 엄마는 바로  그다음날 학교에 찾아가셨고, 나한테 확실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바로 첫날 찾아갔어야 하는데 한발 늦었네. 그년이 돈 달라고 이런 식으로 하네

정말일까? 엄마가 오버하는 거겠지. 말도 안돼.  반신반의했지만,  그다음날 엄마가 학교로 가고 나서 선생님의 태도는 360도 변해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세상에 둘도 없이 다정하고 유머러스한 재미있는 분으로 변신하셨다.  그때 깨달았다. 엄마의 치맛바람은 필요한 것이고 감사한 것이구나.

친구와 크게 싸웠던 적이 있었는데 엄마가 교육청에 가겠다며 반을 바꿔달라며 그 선생님을 협박했던 기억도 있다. 그런데도 그 선생님은 너무나 친절하게 반응하시고 상대 학생을 꾸짖고 아이들 앞에서 날 옹호하시고 배려하는 태도를 보이셨다. 당연히 아이들은 자연스레 선생님이 바람잡아주는 그런 분위기를 타고 나와 싸운 친구를 따돌리고 내 편을 들었다. 엄마의 위력이었다. 매일 학교에 갈 때 엄마가 데려다 주었고, 바로  그때가 엄마가 자기 자신을 잡는 시기였는지 대학교를 또 하나 다니겠다고 넘치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느라 다행히 하교는 혼자 했다. 엄마가 데리러 오기까지 했으면 난 숨막혀 죽었을 지도 모른다. 대신 엄마가 계산한 시간에 집 또는 다음 학원으로 와 있지 않으면 학교에서 교내방송이 울려퍼지곤 했다.

교내에 Aleksandra 학생이 계시면 속히 귀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머님께서 찾으십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

하지만  그때 또 한번 세상을 배웠다. 학교에 엄마들이 찾아오지 않는 친구들은 바로 체벌의 대상이었다. 항상 선생님이 예뻐하고 학생들 앞에서 띄워주고 인기도 많은 아이들은 모두 엄마가 잘 찾아오는 아이들, 꾸중 듣기 일쑤이고, 자주 체벌받는 아이들은 학교에 엄마가 찾아오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말에 의하면, 봉투를 주었을 때 '안받겠다, 이러시면 안된다' 하며 사양하는 선생님보다, '감사합니다' 하고 넙쭉 받아 챙기는 선생님들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더라. 씁쓸했다. 하지만, 학교생활이 원활하려면 필요했다. 예외가 없었다. 초딩시절부터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쭈욱. 당연히 난 무슨 일만 생기면 쪼르르 엄마에게 달려가  고자질하는 치맛바람에 휘둘리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덕분에 마마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고 성인시절의 대부분을 발버둥치며 보냈고, 후유증은 엄청났다. 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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