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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andra the Twinkling Oct 29. 2015

자유로운 시절 일기 06

악몽. 영국편. 하나.

영국에서 내가 살던 집은 참 멋진 구조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주 작은 신발장과 옷을 걸 수 있는 우리나라의 전실같은 넓은 공간. 가파른 계단으로 한층 올라가면 사방이 커다란 유리창으로 둘러 쌓인 엄청 넓은 거실과 작은 방, 그리고 계단 옆 창고. 또 계단으로 올라가면 길게 11자 형인 전형적인 유럽식 부엌. 또 계단으로 올라가면 거실만큼 커다란 유리창으로 둘러쌓인 침실.

처음 이 집으로 들어오던 날이 생생하다. 너무 신기했다. 꼭 이야기 속에 나오는 그런 집 같아서 계단을 오르내리며 신기해 했고, 거의 2m 높이의 엄청 큰 창문으로는 거짓말처럼 여긴 영국이 아닌듯이 햇볕이 따갑게 쨍쨍 눈이 부셨다. 촌내가 풀풀 나는 갓 대학 입학한 새내기에, 그리고 뽀송했을 민낯으로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는 처음으로 엄마 몰래가 아니라, 당당하게 가슴이 깊게 파여 가슴골이 보이는 쫄티를 입고 속으로 우쭐해하며 난 꽤 섹시할거라 굳게 믿었고, 우주 최고로 행복한 날을 맞았다. 도착한 날 파티가 있었다. 새로운 나라에 오자마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내 앞날이 쨍쨍한 햇볕 드는 날만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 영국에서 유학중인 수많은 남자들과 수십명의 여자들 ㅎ. 역시 우리 오빠 다웠다. 그 집은 우리 사촌 오빠가 세들어 살고 있던 집이었다. 남자는 몇 안되어서 기억할 것도 없었다. ㅋ 윔블던 아랫쪽에 같은 집에서 세들어 산다는 섹소폰을 부는 남자 한분과 런던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다는 분, 센트럴에 살면서 백수생활을 즐긴다는 엄청 키가 크시던 분, 스페인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계시는데 잠시 와계신다는 분, 그리고 사촌 오빠하고 같이 집을 쉐어하고 있던 MBA공부하던 아메리칸 인디언 닮은 분과 한인식당에서 일하시는 그들 중 나이가 제일 많던, 거의 아저씨 모습이던 주방장. 다들 엄청 반갑게 환영해주었다. 정말 오빠랑 닮았단 욕 아닌 욕과 함께.ㅋ

내가 오자마자 오빠하고 MBA공부하시던 분은 엄청난 살사댄스에 대한 동경을 품고 산토도밍고 유학길에 오르셨다.ㅋㅋㅋ 그날은 내 환영파티가 아니었던 것이다. 떠나는 오빠들을 배웅하는 자리였다. 난 졸지에 알지도 못하는 낯선 주방장 어르신하고 같이 살게 되었다. 그 당시 마흔쯤 되신 듯 했다. 그 때 내 나이가 꽃다운 만 열아홉이어서 마흔은 어르신이었다. ㅋ

너무너무 지루하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학교에 가는데 주방장 아저씨가 짬뽕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며 집에 없는 몇 가지 재료를 사오라고 시켰고, 난 신나서 학교 끝나고 재료를 사서 돌아왔다. 집 문을 여는데 이상한 구슬픈 아일랜드 민요인듯 한 노랫소리가 들리고 계단을 올라와서 부엌에 들어와 보니... 주방장 아저씨가 100m밖에서도 냄새가 날만큼 취해서 헛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고, 예쁜 상자 앞에서 옛 여자친구와 오고 갔던 편지로 추정되는 수많은 편지들을 하나씩 읽고 계셨다.

내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날 보고

 '희영아 왔어?'
응? 오빠 저 희영이 아니에요.
'희영아 이리 와봐. 한번 안아보자. '
왜이러세요? 저리 가요. 희영이 아니라니깐요


뭐 이런 뻔한 시츄에이션이 있나 싶었다. 가슴이 덜컹 하면서 갑자기 귓가에 맴도는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린줄 알았던 엄마의 처신 잘하고 항상 몸가짐 조심하라는 신신당부가 들리는 듯 했다. 처음 오던 날 입었던 옷도 후회가 되었고, 오빠들 사이에서 이뻐보이려고 했던 몸짓들도 다 되돌리고 싶었고, 저놈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단둘이 남겨졌단 사실에 오빠에게 화가났다.

저놈 저거 취한 척 하는구만 싶었고, 엉거주춤 날 끌어안으러 오는게 보이길래 아주 세게 밀쳐냈다. 주방장 아저씨는 화가나서 날 잡아댕겨서 뒤에서 꽉 끌어안아서 들어올렸고 난 팔을 꼼짝못하게 잡혀서는 더 화가나서 공중에서 발길질을 해댔고 아저씨는 두 다리를 사정없이 내 뒤꿈치에 공격당하시고 놀래서 얼른 날 내려놓으셨다. 또 다시 날 잡으려하고 난 밀고 발길질하고를 반복하며 취해서 잘 몸을 가누지 못하는 틈을 타 얼른 뛰어서 계단 위 맨 꼭대기에 있는 침실로 올라가서 문을 잠갔다. 아저씨는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고 얼르고 달래고 욕하고를 계속 반복하다가 제풀에 지쳤고, 갑자기 부엌으로 내려가서는 세간살이들 내던지고, 접시들을 다 깨부시기 시작했다.

아, 그때부터는 엄청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와장창 소리가 엄청 큰걸 보니, 높이가 2m가 넘는 부엌의 2중짜리 대형 창문을 깬 것 같았고, 유리가 떨어지는 소리, 접시가 떨어지는 소리, 밑에서 주차해 놓은 자동차에 맞아서 경보음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그 옆 자동차의 경보음소리까지 나기 시작하며 온 동네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소리지르는 사람들이 한 둘 생기자 주방장 아저씨는 자기가 아는 언어로 욕을 하기 시작했다. 영어, 스페인어, 일본어로. 난 점점 무서워졌고, 문을 살그머니 열고 발소리가 안나게 주방장아저씨의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핸드폰은 바로 부엌에서 나오자마자 침실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있는 작은 앉은뱅이 의자 위에 아저씨의 다이어리와 함께 놓여 있었다. 천만 다행이었다. 주방장 아저씨가 창밖으로 온갖 손을 이용한 욕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느라 내 쪽을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살금 살금 계단 밑으로 내려가서 다이어리와 핸드폰을 얼른 들고 후닥닥 뛰어올라와 다시 문을 잠그고 들어갔다.

자, 이제 어디로 전화해야 하지?? 문제는 내가 우리 사촌오빠, 사촌오빠와 같이 살사유학을 간 그 오빠 외에는 그 누구의 이름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정말 시험문제 찍기보다 더 떨리는 순간이었다. 내가 영국으로 오던 날 그 파티에 있던 다른 오빠들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덜덜 떨면서 뒤적거리다가 굉장히 비슷한 두 이름을 발견했다. 김X준, 김X준 이라고 써있고, 번호가 하나 있다. 형제인가보다. 여기로 걸자. 심장 뛰는 소리와 손가락 떨리는 진동으로 내 머리까지 다 흔들리는 것 같다. 조심조심 맞게 눌렀나 확인을 하며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번호를 눌렀다. 제발 받아라...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난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아, 여보세요? 저 이 전화는 런던 Holloway의 주방장 아저씨의 전화번호인데요, 아실지 모르겠는데 저는 한XX의 사촌동생입니다. 너무 급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지금 주방장 아저씨가 술취해서 난동을 부리면서 집안을 모두 깨부수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빨리 좀 와주세요. 여기가 어딘가 하면요..
'아, 저 기억 안나세요? 그때 처음 오시던 날 파티할 때 있었습니다. 주방장 형이 난동을 부린다고요? 그렇다고 우리가 거기까지 갈 수는 없구요, 자세히 좀 설명을...'
아니아니요, 그럴 시간이 없어요. 그냥 빨리 좀 와주세요. 난동 정도가 아니에요. 얼핏 봤는데 주방장 아저씨가 피투성이에요. 창문은 다 깨져있어요. 사방이 피투성이에요. 빨리좀요.. 엉엉엉

갑자기 날 안다는 소리에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안심이 되면서 눈물이 났고, 그 사람은 눈치가 대충 골치 아픈 상황이라서 올 수 없다며 발을 빼려 하려다가 내가 우는 소리에 당황을 하며 일단 오겠다고, 하지만 윔블던 아랫지방이라서 런던 북쪽까지 가려면 두시간은 걸릴거니까 조심히 기다리시라고 했다. 두 시간이라니.. 그걸 어떻게 기다려. 또 다른 곳에 걸어볼까 하며 다이어리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현관의 벨이 울렸다. 주방장 아저씨도 갑자기 조용해졌고, 난 숨을 죽이고 가만히 들었다.

누구세요?

아, 영어소리가 들린다. 아마 시끄러워서 이웃이 찾아왔나보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경찰입니다. 문을 열어주세요. 민원이 들어왔습니다.
경찰이 무슨일이시죠?

아저씨의 목소리는 긴장되어 있었고, 전혀 취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빨리 문을 열지 않으면 강제로 열고 들어가겠습니다.


만세! 속으로 외쳤다. 들어오는 소리가 한 두 명이 아니었다. 테러라도 난 줄 알았나보다. 구두 소리가 점점 올라오더니 내가 있는 방을 두드렸다. 난 문을 열었다. 눈물에 아이라이너가 번져있었고 아저씨랑 몸싸움을 하느라 머리도 헝크러져 있는 내 모습을 보더니 남자 경찰들은 모두 나가고, 여자 경찰이 들어왔다. 너무 안심이 되었다. 여경은 조용히 다정하게 내 등을 스다듬으면서 달래듯 말을 걸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랫층에 있는 저 남자분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십니까?
아랫층의 남자분이 소리를 지르고 당신께 욕을 하거나 위협을 하였나요?
혹시 저 남자분이 신체에 상해를 가하려고 하거나 성적으로 강압적인 행동을 하였습니까?
저분이 두려워서 대답을 제대로 못하시는 건 아닙니까?
어떻게 해드리길 원하십니까?


눈물나게 고마왔다. 어떻게 해서든 안정을 시키고 조금이라도 기분상으로라도 위협을 느꼈다면 당장 구속시키겠다고 했다. 영국 최고다. 그치만, 저 아저씨와 사촌오빠의 관계도 잘 모르고, 아저씨랑 우리 이모랑도 잘 안다고 했으니 구속시키면 왠지 안될 것 같다. 그래서 그냥 피를 흘렸으니 병원 치료만 해주시고, 여기서 저사람을 좀 나가게 해달라고, 저사람도 피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여경은 내가 아직 무서워서 떨고 있다는 걸 보고 분명히 무슨 일을 당한게 틀림없다고 믿고 있었다. 몇번이나 달래고 얼르고 확인을 하길래, 몇번이고 괜찮다고 아무일도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결국 나아아아중에 후회했지만 말이다. 아니 아직까지 후회중이다. 콩밥한번 먹였어야 하는데...


타지에서 아무도 없는데 열아홉에 이런 일을 당했다면 제대로 정신 차리고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는 현명한 여자가 몇이나 될까? 모르겠다. 어쨋건 다행히도 경찰이 주방장 아저씨를 데리고 나갔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심장이 쿵쿵거리고 수전증 걸린 사람처럼 손이 떨린다. 조심조심 내려와 보았다. 끔찍했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 더.

현관부터 제일 꼭대기에 있는 내가 숨어있던 침실까지 벽에 피칠갑이 되어 있다. 부엌바닥은 피가 마치 포도주를 한병 모두 쏟아놓은 것 처럼 온통 끈끈한 검붉은 색이다. 유리는 곳곳에 파편이 튀어있다. 접시는 모두 깨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 가 없다. 유리잔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어마어마하게 컸던 유리창문에는 창틀에만 유리가 조금 붙어 있고, 뾰족뾰족하게 꽂혀 있다.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본 기억이 있는것 같다. 싱크대 위의 끓이다 만 짬뽕과 그릇들과 야채들 모두 빨간 피와 잘 섞여있다.


이건... 정말... 꿈이 아니었을까? 이거 정말 내가 겪은 일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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