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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andra the Twinkling Oct 30. 2015

자유로운 시절 일기 07

악몽.  영국편. 두울.

학교를 마치고 오늘은 아이들하고 노닥거리거나 수다떠는걸 생략하고 짬뽕 배우러 가야해서 빨리 헤어지고, 재료 때문에 바로 마트에 들렀다가 집에 온 시간이 약 한 시 반.

지금 시계를 보니 저녁이 되어 간다. 5시가 넘었다. 참 오래도 발광을 했나보다.

경찰이 주방장 아저씨를 데리고 가고 나서 바로 나와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제자리에 앉아서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상황 파악도 안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폭풍이 지나간 것 같고, 정신도 얼떨떨하고 기분도 빙판에서 넘어진 것 처럼 얼얼하고... 한참을 지나서야 조용히 집안을 둘러보며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심하게 피가 벽에 범벅이 되어있어서 현관쪽으로 내려가 보지는 못하고 부엌에서  멈칫멈칫하는데,

갑자기 문이 덜그럭 거리며 열쇠로 문 여는 소리가 났고 20분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주방장 아저씨 소리가 들린다. 방으로 도망가지도 못하고 나쁜짓하다 들킨 아이처럼 난 부엌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여전히 다리도 손도 덜덜 떨고 있다. 무섭다. 갑자기 또 해코지를 하면 어떡하지?


야! 이년아, 넌 경찰들한테 애인이라고 했어야지, 그리고 도대체 뭐라고 한거야?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신해서 돌아온 것 같다. 그 전까진 내가 겪은 한, 주방장 아저씨는 적어도 다정하고 내성적이고 조용한 아저씨였는데???

뒤통수를 세게 얻어 맞은  것처럼 현기증이 나면서 귓가에서 윙- 소리가 들렸고, 눈알은 튀어나올 것 같이 아프다. 정신은 아주 맑아졌다. 아주 또렷하게 제정신으로 돌아오면서 심장이 아주아주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띵- 하던 그 5초 동안 내 정신이 순식간에 5살은 늙어버린 것 같고 내가 아주 냉철해진것 같은 그런 느낌? 배신감과 분노와 어이없음과 아쉬움과 안타까움과 실망과 후회. 그렇지만 갑자기 두려움이 싹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다리와 손의 떨림도 사라졌다.

 

애인 사이라고 했어야지! 그냥 사랑싸움이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어야지! 날 어디로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냐?
얼른 유리나 치우고 청소나 해! 이거 니가 다 치워!


난 분노 때문인지 현관문을 열어놔서 추워서인지 모르지만 온몸이 싸늘해졌고 말이 한마디도 나오지를 않아, 이를 악물고 유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계속 궁시렁 거리며 욕을 하며 나한테 성질을 부리고 있다. 내가 전화했던 사람들은 증발해 버린 건가? 안 오는가 보다. 아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오늘을 어떻게 넘길 것인가 머리를 굴려본다. 청소를 시작했고 부엌의 큰 파편들은 이제 거의 수습이 되어간다. 짐을 싸서 나갈까, 어디로 갈까, 어떻게 빠져나갈까, 온갖 생각을 하며 한참을 머리를 굴려보는데...


갑자기 발자국 소리와 웅성대는  소리... 누구지?

형! 형! 무슨 일이에요? 우리 왔어요! 형!


왔다! 드디어 왔다! 살았다! 왠지 경찰보다 더 반가웠다. 문까지 열려 있어서 이들이 들이 닥쳐준 게 감사했다.


어휴 술냄새! 이게 무슨 일이에요? 이게 다 누구 피야? 형 손에 붕대 감았네? 이거 다 형 피에요?


아래층에서 웅성웅성 들려오는 말소리.


어 아무 일도 아니야. 진짜 별일 없었어. 쟤가 말썽 좀 부려서...


헐?? 쟤는 나야?? 설마??

가식 쩌는 주방장 아저씨의 목소리는 예전에 듣던 익숙한 얌전한 톤으로 돌아갔다. 다시 내성적이고 다정한 아저씨로 변신했다.

한분이 올라왔다.

저 김철준이에요. 우리 구면이죠? 한XX 동생분 맞죠? 무슨 일이 있었어요? 말해 줄 수 있어요?


대충 줄거리를 말해주었다.  못 믿는 눈치다. 눈에 의심이 가득하다. 그럴 수 있다. 나보고 술을 마셨는지 물어본다. 몇 번이나 되묻고 되묻는다. 어이가 없네.  그분이 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내려가 버렸다. 내가 취해서 얌전한 주방장 아저씨를 모함하고 있다거나 내가 일을 저질러놓고 아저씨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하는 건지 내려가 확인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정말 억울하고 기가 막혔다. 서러움에 아까도 안나던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괜찮아. 별일 아니니까 너희는 집으로 돌아가. 뭐하러 여기까지 왔어? 근데 무슨 일로 온 거야? 런던 올 일이 있었던거야? 그냥 들른 거야?


주방장 아저씨는 내가 전화해서 불렀을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나쁜 짓 하다 들킨 초딩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자꾸 사람들을 돌려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내속은 바짝바짝 탔고 어떻게든 내가 나가던가 저 사람을 내보내야 하는데... 오늘 밤을 저 인간과 한 집에서 보낼 자신이 없다. 입술을 깨물고 내려갔다. 거실까지 내려가기가 쉽지 않다. 주방장 아저씨가 보일까봐 싫다. 유리 밟는 소리에 내 기척을 느끼고는 다른 분이 올라왔다. 키가 많이 컸고 아까 그 분과는 다르게 얼굴에 걱정이 보인다.


괜찮아요? 어린 분이 이렇게 사방이 피에 유리조각에... 놀라지 않았어요?


안도감인가? 고마움인가? 눈물이 주르륵 흘렀고 멈추질 않는다. 억울함에 말도 못하고 그 분을 쳐다보며 눈물만 흘 있으니,  그분이 날 데리고 침실로 도로 올라가서 침대에 앉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진정하고 나한테 말해줄 수 있겠어요? 너무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제 이름은 태준이에요. 이름이 aleksandra 맞죠? 한XX씨 동생분이고. 기억하고 있어요. 저 기억하죠?
어차피 말해도 믿지 않을거잖아요. 아까 올라오신 김철준이란 분께 다  얘기했는데, 믿지 않으시던데요 뭐. 저 거짓말쟁이 아니에요. 제가 이상황에 거짓말해서 뭐해요.
아니에요. 다 믿어요. 지금 제정신으로 이걸 다 겪은 사람은 aleksandra 뿐이잖아요. 형은 술냄새가 많이 나던데요. 저 형 취하면 기억도 못하고 좀 그래요. 제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를 알아야 뒷 수습을 하죠. 안 그래요? 솔직하게 다 말해봐요.


최면에 걸린 것처럼 처음부터 자세하게 말했다. 너무 자세하게 말했다. 그리고 주방장 아저씨 꼴도 보기 싫고 나 좀 이 집에서 멀리 꺼내 달라고, 차라리 호텔이라도 가겠다고. 그 정도 돈은 있다고. 얘기했다.  그분은 대답 없이 조용히 이불을 꺼내며

새옷으로 갈아입어요. 검정색이라서 안보이지만 아마 피도 묻었을 거고 유리도 튀었을 지 몰라요. 그냥 지금 입고 있는 옷 나같으면 기분 나빠서 못 입고 있을 것 같은데. 집이 공기가 차니까 따뜻하고 편한 걸로 갈아입고 계세요. 내려갔다 다시 올게요.


아래층에서 태준이라는 사람이 철준이라는 사람보고 주방장 아저씨를 데리고 내려가라고  얘기했다. 어디를 내려가라는 거지? 주방장 아저씨는 아주 강력하게 아무 데도 안갈거라고 한다. 계속 실랑이를 벌이는데 철준이라는 사람이 아저씨를 달래면서 술 땡기지 않냐면서 유명한 PUB에 가자고 꼬신다. 오늘 온 이유가 있다며. 주방장 아저씨는 결국 무언가 신나는 제안을 들었는지 신나게 예쁜 꼬까옷으로 갈아입고 가볍게 철준이를  따라나섰다.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지자 난 무너지듯이 온몸에 힘이 빠졌고, 온몸이 다시 덜덜 떨리기 시작하면서 춥고 눈물이 나고 콧물이 나고 정신도 아득해졌다.

잠시 후 이라는 사람이 올라왔고, 조용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얘기했다.


우리 꼬마 아가씨가 너무 놀랬구나. 난 사실 아가씨 오빠 한xx씨는 잘 몰라요. 근데 너무하네. 이렇게 이쁜 동생을 저런 응큼한 남자하고 단둘이 남겨놓고 가버리다니. 나도 여동생이 둘이나 있지만 이렇게 예쁘지 않아요. 너무 예뻐서 주방장 아저씨가 잠시 실수한걸 거예요. 많이 놀랬죠? 이제 다 끝났어요. 내가 주방장 아저씨 아주아주 멀리 보냈으니까 당분간 안 볼 수 있어요. 내가 얼굴 절대 안볼 수 있게 해줄게요. 걱정 마요. 여기로 다시 온다고 해도 내가 문 안 열어주고 못 들어오게 할게요. 착하네~ 옷도 벌써 갈아입었고. 말도 잘 듣네. 이제 안심해도 되니까 한숨 푹 자요. 내가 밀크티 한잔 타 올게요.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거 마시고 자요.  


혼잣말 같은 말로 도란도란 날 달래고는 밀크티를 타다 주고 문 닫고 나가는데, 갑자기 이 핏속에 남겨진단 생각에 몸서리 쳐졌다.

멀리 가세요? 집에 가시는 거예요?

문 닫고 나가려는 순간 목구멍에 뭐 걸린 목소리로 쪼그맣게 개미소리로 물었다. 

이런 쑥대밭에 꼬마 아가씨를 남겨두고 가버리면 제가 정말 나쁜놈인거겠죠? 전 거실에 있을 테니까 무섭거나 무슨 일 있으면 불러요. 잠이 안 오더라도 내가 주방장 아저씨를 딴 데로 돌려보낸 수고를 생각해서라도 자려고 노력해보세요. 한숨 자고 나면 배고파질 거예요. 그럼 부르세요.


이 분은 천사인가? 최면에 걸린 듯이 난 잠에 빠졌다. 꿈속에서 주방장 아저씨는 부엌 창문 밖으로 창문과 함께 떨어져서 유리파편과 함께 산산이 깨져 먼지들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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