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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andra the Twinkling Nov 21. 2015

자유로운 시절 일기 09

사라진 악몽.  영국편. 마지막

햇빛이 쨍쨍하고 온몸이 노곤노곤하다. 따뜻한 햇살이 느껴진다. 힘은 없지만 포근하다.

잘 잤다. 도대체 요즘 영국 날씨는 왜 이렇게 좋은 거지?

응? 햇빛이? 내가 어제 잠들었다가 아침까지 잤나 보다.

깨어보니 어제의 악몽이 사실이었는지 꿈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겪지 않은 일인지도 모르겠어.

문을 열고 나왔다. 다리가 후달거린다. 너무 오래 잤나 보다.

내가 정말 꿈을 꿨던 거였나? 침실에서 계단을 내려오면서 보니, 바로 보이는 부엌 풍경 속에는 피투성이의 벽과 유리 없는 창문은  온데간데없다. 갑자기 혼란스럽다. 벽도 깨끗하고, 창문에 유리도 있다. 내가 악몽을 꿨었나보다. 근데 너무 생생한 거 아냐?

말도 안돼. 어제 입은 피 묻은 옷들은 대체 뭐야?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릇들도 모두 깨끗하고 가지런하다. 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유리 한 조각 보이지 않는다. 부엌에서 한층 더 내려왔다. 거실로.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 어제 학교 가기 전 그 모습 그대로다. 갑자기 내가 정신병이 온 게 아닌가 싶다.

딱 한 가지 이상한 건 집이 조용하다. 너무 조용하다.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집 구석구석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 깨끗하다. 조용하다. 나 혼자다.

이건 무슨 공포 영화도 아니고. 어제 오늘 연속으로 너무 이상한 거 아냐?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공포가 몰려온다. 현관문이 어마어마하게 커지면서 숨이 가빠진다. 왜 이러지?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숨을 쉬어야 하는데, 들이마셔야 하는데,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목구멍이 부어올라서 꽉 막혀버린  것처럼 공기를 들이마실 수가 없다.. 어마어마하게 커다래진 현관문 앞에서  주저앉아서 숨을 쉬려고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아득해진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눈이 부시게 눈앞이 하얘졌다. 숨이 쉬어졌다. 천식 환자처럼 숨을 큰소리로 거칠게 내쉬면서 아, 살았다 하며 헐떡거렸다.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쓰러진 거예요? 왜 이래요? 정신 차려요!


으응? 누구 목소리지? 누구지?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린째 눈을 살그머니 떠보니 어제 본 그 얼굴이다. 아 어제 일이 꿈은 아닌가 보네. 이분이 여기 있는 걸 보니. 근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제가 어제 꿈꾼 거 아니죠? 분명히 어제 잠들 때 집이 난장판이었는데, 혹시 설마... 청소하신 거예요? 혼자서? 아니, 불가능한데. 하루만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어떻게 된 거예요? 너무 혼란스러워요.


아, aleksandra 씨 이틀 동안 자던데요. 괜찮아요? 배고프죠? 의사가 다녀갔는데 괜찮데요. 그냥 푹 자면 될 거라고 하길래 깨우지 않았어요.


아. 내가 이틀을 잔거였구나. 그렇다면...


아. 이럴 땐 몽땅 다 혼자 했다고 거짓말하고 싶어지는데. 하하하. 당연히 제가 마술사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못하죠. 창문은 사람 불러서 기술자가 유리를 가져와서 끼웠고. 그릇은 제 친구들이 대충 사 와서 구색은 맞춰놨어요. 하지만, 청소는 혼자 했어요. 친구들 보기에도, 기술자 보기에도 이상할 것 같아서. 무슨 테러 현장도 아니고. 그렇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청소했죠.


와, 이 사람. 나보다 낫다. 능력자인걸. 내가 꿈을 꾼 걸로 착각할 정도로 깨끗이 청소를 해놓다니. 갑자기 미안함과 고마움과 믿음ㅋ? 같은 게 생겨났다. 이틀 동안 그 모든 걸 하나도 듣지 못하고 잤다니... 그것도 신기했다. 그래서 그렇게 힘이 없고 다리가 풀렸나 보다.


저... 혹시 저 때문에 이틀 동안 여기 매달려 계신 거예요? 저 때문에 청소하고, 고생하고 할 일도 못하시고 그런 거 아니에요?


와, 나에 대한 걸 하나도 기억을 못하시는구나. 제가 그렇게 존재감이 없었었나요?ㅎㅎ 저 런던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에요... 나름 시간은 자유로와서 괜찮아요. 고생은 뭐. 잠자는 공주가 꼭대기 층에서 자고 있어서 힘든 줄도 몰랐어요. ㅎㅎㅎ 제 룸메가 남자이다 보니, 손님 왔을 때 남자들끼리 살아서 냄새난다는 소리 안 들으려고 청소를 하도 열심히 하다 보니, 이런 것쯤이야 별일도 아니죠. 걱정 마세요. 웬만한 여자들보다 청소는 잘할 거예요. 배고프죠?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밖에 나갈 힘 있어요? 영국 와서 제대로 된 Fish n Chips 먹어봤어요? 아, 먹을 생각은 있긴 한거죠? 뭐, 없어도 먹어야 해요.


기억을 더듬어서 쓰다 보니 굉장히 수다쟁이 같은 이미지가 되어 버렸는데 ㅋ 이분은 말을 아주 느리게 차분차분히 짧게 하시는 분인데. ㅎㅎㅎ 나가서 오랜만에 햇볕을 쬐면서 학교도 빠지고 느긋하게 걸어다니면서 간만에 한국말로 수다도 떨고 이것저것  사 먹으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아, 런던에 와있구나 라는걸 실감했던 것 같다. 내 트라우마 극복이라는 핑계로 우린 열흘 정도를 둘 다 학교도 안 가고 런던 구석구석을 쏘다녔다. 내가 살던 곳은 런던 북쪽 Holloway라는 곳이었고, 여죄수 감옥으로 유명한 곳이고, 철준태준이 두 분이 살던 곳은 New Malden이라는 한인타운으로 엄청 떨어진 곳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KTX를 타고 가야 하는 지방이었던 것이고, 차로는 안 막힐 때 약 두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주방장 아저씨는 원래 성도착적인 기질이 있으셨고, 영국으로 배낭 여행 온 여자아이들을 꼬셔와서 실제로 성추행도 하고 그랬었다고 하더라.  두고두고 콩밥 못 먹인걸 후회했다. 그 아저씨가 나중에는 내가 먼저 꼬리를 쳐서 벌어진 일이고 어쩌고 하면서 소문도 냈었더라고 하더라. 당연히 난 그 집에서 나갔고, 하숙을 시작했었다. 이후에 영국에 있는 동안 몇 번 마주쳤지만 정말 뻔뻔하고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 표정이더라. 오히려 나로 인해서 까발려진 자신의 만행으로 인해 맹수 같은 표정으로 날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며 적대감을 대놓고 드러내더라. 난 그놈을 볼 때마다 혼자 말문이 막히고 부들부들 떨리고 혈압이 떨어지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지... 오래 오래도록 그놈에 대한 분노를 어찌 처리할지 모르는 감정 통제 장애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난동 이후 모든 걸 수습하고 경찰서까지 왔다 갔다 하며 민원을 하나하나 다 처리하시고 소리 없이 조용히 집안 수습까지 하신  그분은 잠시였지만 그저 학교와 집을 오가는 다른 어학연수 온 학생들과 다를 바 없었던 내 생활에 차원이 다른 진짜 영국을 느끼고 배우게 해 준 분이셨다.

한 달에 한번 정도 나타나서는 소소한 car boot sale을 동네마다 찾아다녔고, 런던의 숨은 맛집들을 찾아다녔고, 정신없는 차이나 타운에서 빠찡코를 갖고 노는 법도 가르쳐주고, 내 영국 생활을 즐겁게 장식해 줬던 내 친구 T를 만나게 해 준 은인이었다.

추억 속의 한 부분이지만 천사처럼 왔다가 영국의 햇빛처럼 날 내리쬐어 주고는 그렇게 런던의 안개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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