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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andra the Twinkling Nov 27. 2015

자유로운 시절 일기 10

첫사랑. 하나.

내 첫사랑은 젖냄새가 막 가신 중딩시절에 찾아왔다.


요즘 중딩들이야 발육도 좋고 성숙해서 놀라운 일이 아니겠지만, 우리때는 중딩이 되어도 발육도, 분별력도 지금의 초딩저학년 수준이었다. 몇몇 아이들 빼고.ㅎ

난 중학교를 다닐때까지 우리집이 잘 사는지 못 사는지조차 알지도 못했고 그런 의미 조차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남녀 관계는 말할것도 없었다. 그저 천방지축으로 교실에선 남자 아이들과 책상 위를 뛰어다니는 놀이를 하고, 복도에선 캔을 쭈그려뜨려 캔야구를 하고 주말엔 놀이공원으로 놀러다니고, 학교와 학원 안가는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단순하게 본능적으로 사는 어린애 수준이었다.

하지만, 딱 한가지 나한테 중요하고 신중한 일이 있었으니... 패션이었다ㅋㅋㅋ 지금 떠올려도 어처구니 없어 막 웃음이 나는데.

아마도 디자이너였던 엄마와 패션업계에 몸담고 계셨던 아빠의 영향이 튀김옷처럼 내게 골고루 입혀져서 그랬던것 같다. 그렇게 믿어야지.ㅋ

내 머리속에 그려진 이미지대로 옷을 입기 위해 내옷장, 부모님옷장, 동생옷장을 다 뒤지고 최소 하루 전날 꼭 입을 옷을 준비해 놓았다. 특별한 날, 내 머리속 이미지대로의 옷들을 우리집 안에서 못 찾으면 내 용돈이 허락하는 한도내에서 구입을 해야하기 때문에 고속터미널 지하를 쏘다니거나 동대문까지 미친 수고를 하며 옷을 사러 다녀야만 했다. 그러니 대략 일주일치 옷은 머리속에 정해져 있었다.

난 아주 특이한 패션 취향이 있기로 아이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아빠가 다니던 회사는 외국계였고 취급하는 옷들은 내수용이 전혀 아닌 수출용이다보니 그 영향도 무시할수 없었다.

나의 천국은 아빠 회사의 커다란 샘플실이었다. 일주일에 한번은 꼭 들러서 쇼핑을 했고 아빠가 매번 허락하진 않았지만 내가 찍어놓은 옷들을 한아름 들고오곤 했다. 이런 젖비린내나던 발육부진의 꼬마가 옷에 왜 이렇게 집착했는지 생각해보니 그 무렵 첫사랑이 찾아와서 그랬던게 아닌가 싶다.ㅎ

심지어 방학식, 개학식, 학예회등 행사들이 있는 날에 입을 옷은 한두달전에 미리 정해놨다. 패션에 대한 이해도 독특했다. 당시 유행도 어느정도 따라야 하지만 유니크해야 한다는게 타협불가능한 내 고집이었다. 사진 몇장이 남아있는데 중학교 2학년 학예회날은 14살인 내게 일생일대의 중요한 날이었고, 그날 입기로 내가 정한 옷은 박스핏의 하운드투스 체크무늬 싱글버튼 재킷에 광택나는 검은 레깅스, 그리고 검정 워커였다. 지금 다시 떠올려도 신기하게 나이에 맞지않게 구체적이었고 시대를 앞섰던 것같다.ㅋㅋㅋ 아.. 이거 실화인데ㅋ 우리나라의 유행이나 그당시 스타일이 아니라서 진짜 옷도 신발도 구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나 당시의 디테일이 아직까지 생생하고 기억에 남는건 그 날 나의 첫사랑 눈에 띄기 위해서였고, 뒤돌아보면 졸업논문 때보다 더더 공들였던 것 같다.


우리 친구 무리중엔 아주 가난하지만 아마도 그 때문에 조숙했던 친구 H가 있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런 사실을 잘 몰랐었다. 우리학교는 논현동이었고 아빠회사는 우리학교에서 걸어가도 되는 거리여서 가끔 아빠의 샘플실에 친구를 데려가면 아빠가 우리에게 짜장면을 시켜줬고 다 먹으면 직접, 혹은 기사아저씨를 시켜서 그 친구집이 멀다고 데려다 주셨다. 항상 그친구는 거짓말을 눈에 보이게 했다. 남현동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 대문이 스텐레스같은 광택나는 철제였고 엄청 길어서 20미터도 넘었던 그런집 앞에서 우리집이라며 내려달라고 했었다. 매번. 가난을 숨기고 부끄러워하느라 거짓말을 해야했던 그 어린마음은 세상을 빨리 배워 또래들보다 조숙했던것 같다.

어느날 그 친구가 뜸들이며 얼굴까지 붉혀가며 고백을 했다.

나 1반에 L을 좋아해. 아주많이. 결혼하고 싶어.


그때 내 뇌에 어떤 충격이 있었다. 이젠 누군가를 좋아해야 하는 나이인가보다. 쟤는 왜 나보다 저런 감정을 빨리 느꼈을까? 결혼이라니. 쟤가 미친건가. 아니, 이제부터 그래야 하는건가?난 왜 그런 느낌이 없지? 나도 누구를 좋아해야 하는거 아닌가?

짧은 순간동안 너무나 많은 생각과 혼란이 내 작은 뇌속을 헤집고 다녔고 급기야 어지러워졌다. 그래도 생각은 멈추지 않았고 충격상태는 집에 갈때까지 계속되었다.


저거봐라, 길건너 저 정류장에서 매일 L은 버스를 타. 그리고 옷을 항상 헐렁하게 입어. 또, 머리를 쓸어 올리는 버릇이 있어. 쟤랑 친한 친구가 얘기해줬는데 아빠가 재벌 2세래. 난 꼭 저런 부자인 L하고 결혼할거야. L하고. 꼭...


친구는 굉장히 구체적이었다. 재벌이라니... 그런거까지 생각하다니. 내가 갑자기 한심하고 바보같고 어린애 같고 자존심이 상했다. 나도 좋아하는 사람을 정해야해. 하지만 내가 아는 남자놈들은 모두 나랑 까불고 책상위를 타고 넘고, 뛰어다니며 노는 유치한놈들 뿐이었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왠지 그렇지 않은 우아한 왕자같은 사람이어야할 것 같았다. 그치만 모르는 사람을 좋아할수도 없고 아는 놈도 좋아할 놈이 없고. 그 나이의 나는 아주 많이 당황했다ㅋ 누군가를 좋아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이틀, 삼일 지나가면서 점점 커져갔다.

내친구는 점점 L에 대해 이야기하는 횟수가 많아졌고, 1반 체육하는 날은 대놓고 운동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쉬는시간이면 날 데리고 1반 주변을 어슬렁거렸고, 하교할때면 그 정류장 길건너에서서 L이 버스타고 집에가는 모습을 함께 바라보았다.

어느덧 나도 같이 눈으로 항상 그를 쫓고 있었고 H의 감정이 나에게 이입되어 나도 그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첫짝사랑이 시작되었고 우린 2학년이 되었다. 같은반이 되었다고 H와 나는 좋아서 팔딱팔딱 뛰었다. 그리고 L을 발견하고는 내심장도 H의 심장도 두근거렸고 그저 얼굴을 붉히며 행복한 미소를 지을수밖에 없었다.

어릴때는 누군가를 같이 좋아하는것도 우정이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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