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낙인과 혐오를 넘어 이해와 공존으로

by 나무엄마 지니


머리가 복잡할 때 읽으니 편안해지는 책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그저 맘 편하게 하는 농담을 엮은 글모음은 아니라 읽고 나면 마음 한편에 남는 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생각과 편견으로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낙인' 찍을까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맞다고 생각하며 상대방을 종종 판단하고는 합니다. 그게 어떨 땐 친절로 나타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무시와 편견으로 나타날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워킹맘이신 어머니가 집에 없을 때면 혼자 피아노를 치고 친구들과 놀고 있었을 때가 생각납니다. 저 아파트 위층에서 "쟤랑 놀지 마~"라는 어느 엄마 말을 들은 기억이 나는 건 왜일까요. 그것뿐이었을까요.


과연 제 스스로도 타인을 낙인찍은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당당히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또 성경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여기서 이 여인을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더냐."라는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


책을 읽는 것은 정보를 얻기 위함이 있기도 하지만, 나의 생각과 비슷한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책 속에서 생각을 공유하는 기쁨이 이렇게 글을 공유하며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타인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되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해봅니다. 왜냐구요? 제가 그 사람의 인생을 살아보지 않아서 얼마나 아픈지, 슬픈지, 힘든지, 좋은지, 기쁜지 알 수가 없을 테니까요.




p.6 그 해 가을, 가수 겸 배우 설리 씨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설리 씨는 사망하기 전에도 자해로 병원 진료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대문에 자살 고위험군이라는 생각을 했던 터라 더 안타까웠다. 사망 자체도 마음이 아팠으나 언론이 그녀의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 못내 불편했다. (...)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이 왜 적절치 않은지... (...)


p.8 실제로 정신과 환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대중의 낙인과 편견을 가장 효과적으로 줄이는 방법은 낙인이나 차별의 대상이 되는 집단 구성원을 직접 만나는 일이다. 내가 편견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내 눈앞에서 스스로의 의미 있는 삶을 소개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간직하고 있던 편견에서 벗어나게 된다.


p.11 나는 마치 사람 도서관처럼 내 환자들과 다른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아줄 수 있는 책이라면, 세상에 내놓을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p.13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이 일상에서 나와 다른 누군가를 만났을 때 또는 내 가치관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기 힘들 때, 그 사람을 판단하기에 앞서 잠시라도 그의 이야기를 궁금해할 수 있다면 좋겠다.


p.66 상담에서 가장 중요한 자세는 상대방을 내 잣대로 재단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늘 환자를 진심으로 대하면, 환자 또한 나를 진심으로 대한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나는 그날 할머니를 내 잣대에서 위험하다고 섣불리 판단했다. 나는 스스로가 자못 부끄러웠다.


내가 할머니를 경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표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노숙자였기 때문에? 부끄럽지만 아마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듯싶다.


p.67 미국에서 소수 인종으로 아이를 키우는 일이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 그러나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우선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선입견 없이 바라보고자 노력하는 것 아닐까 싶다. 옷차림과 표정 그 너머에 숨어 있는 따뜻함을 알아차리지는 못해도, 적어도 타인을 덮어놓고 먼저 판단하지 않기. 내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일 것이다.


p.82 "모르지 않을까. 그런 일을 당해본 적이 없을 테니까." 그 교수가 무심하거나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만큼만 알 수 있다는 확신에서 나온 말이었다. 미국에서 백인 남성으로 태어나 평생 엘리트 코스만 밟은 사람이 인종차별을 경험했을 리 없겠지. 아마 그 교수는 내가 받았을 상처의 깊이를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마이클은 고개를 끄덕였다.


p.82 "레지던트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겠지만 결국 네가 받아들여야 하는 건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이야. 네 말대로 그 교수는 네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몰랐을 가능성이 커. 설사 안다 해도 어떻게 너를 위로해야 할지 몰랐을 거야. 그걸 이해해야 해. 난 작년에 1년 차로 근무하면서 환자한테 티거란 말을 두 번이나 들었어. 내가 그때 집에 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니거: 흑인을 비하하는 속어


p.105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라(Walk a mile i one's shoes)'는 격언을 떠올리게 해서다. 물론 누구도 (모든)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걸어볼 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구는 나에게 타인의 경험과 관점, 삶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는 자경문과 같다.


p.118 영문으로 동정(sympathy)과 공감(emapthy)은 매우 유사해 보이지만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큰 차이가 있다. 동정은 그리스어인 'sun('함께'라는 뜻)'과 'pathos(감정)'을 합친 데서 연유한다. 즉 동정은 어떤 사람의 바깥에서 그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다. 반면에 공감은 그리스어의 'em('안'이라는 뜻)'과 'pathos'를 합친 말에서 왔다. 타인의 감정을 그의 안에 들어가서, 마치 그 사람의 거죽을 입고 느끼듯이 이해하는 것이다.


동정심은 고통을 겪고 있는 주체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철저히 타자화한다. 고통을 겪는 사람을 연민하지만 그 아픔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동정심은 나와 고통을 느끼는 주체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반면, 공감은 고통을 겪는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걸어본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고 느낌으로써 비로소 그 고통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덜어낼 수 있다.


p.125 정신역동이론 중 '분열'이라는 방어기제는 세상을 흑백으로 나누어 생각하게 만든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를 흑백 논리 또는 이분법적 논리라고 부른다. 이분법은 복잡한 상황을 쉽고 간단하게 정리하게에 매혹적이다. 그러나 정리 이외의 다른 역할은 없다. 우리 아니면 남, 내 편 아니면 적, 모 아니면 도라는 생각 속에 중간 지대나 공생, 상생은 없다. 나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상대방의 권리를 찾는 것이 곧 내 권리를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회, 즉 분열의 사회는 양측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p.137 편견 어린 시선과 사회적 낙인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중증 정신 질환자는 때로 그 낙인을 체화하는데 이를 내재화한 낙인(internalized stigma) 혹은 자기 낙인(self-stigma)이라 부른다. 정신 질환자를 향한 대중의 편견(가령 '정신과 환자들은 위험하다')을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믿게 되는 것이다.


p.149 "정신 병동에 강제 입원 된 후 조울증을 진단받고 모든 게 달라졌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은 절 미친 사람 취급했고, 결국 떠났죠. 그래도 선생님과 사화복지사님만은 저를 있는 그대로 봐주었어요. 조울증이 저의 일부일뿐 저라는 사람을 규정하지 않는다는 말씀, 감사해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p.154 낙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사회적 낙인'으로 정신 질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부정적이고 차별적인 시선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앞서 설명했던 '자기 낙인' 혹은 '내재화한 낙인'으로 대중의 편견, 차별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개인이 자신이 앓는 질환에 수치심을 느끼는 등 부정적인 태도를 스스로 체화하는 것을 일컫는다. 마지막으로 '제도적 낙인'이 있다. 이는 기업이나 정부 같은 대규모 조직에서 일어나는 정책적 차별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신입사원 선발 과정에서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정신 건강 서비스에 적은 예산을 편성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p.156 올림픽 23관왕에 빛나는 수영 선수 마이클 펠프스. 펠프스 하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결정짓는 역영을 마친 후 포효하는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맨해튼 옥외광고물에서 그는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에 타이 없는 정장을 입고 "심리 치료는 제 인생을 바꿨어요.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펠프스는 자신의 정신 질환(우울증, 불안, 자살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힌 대표적인 유명인사다. 우울증이 너무 심했을 때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식음을 전폐한 채 며칠 동안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가득했다.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고 싶지 않다.'


자살 생각이 심해지자 그는 스스로 정신 병동에 입원했다. 한없이 침전하는 것만 같았던 그에게 입원은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심리 상담과 정신과 치료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터놓았고, 다행히 가장 힘들었던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 이후 펠프스는 여러 강연, 인터뷰, 토크쇼 등에서 자신의 우울증을 고백했다.


p.158 "저는 이제 알아요..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요.. 물론 낙인은 여전히 존재해요. 그래서 자살률이 올라가는 거예요. 정신 질환을 이야기하고 고백하는 걸 두려워해서요. 그러나 적어도 이제는 사람들이 조금씩 정신 질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기 시작했어요." - 2018년 시카고에서 열린 케네디 포럼에서, 펠프스.


p.168 이성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접근하면 그가 죽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가 수없이 많을 테니까. 사랑하는 가족, 아끼는 친구들, 성공적인 커리어까지. 하지만 자살로 사망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선택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왜 누군가는 자살을 시도하는 것일까?


p.170 자살을 생각하거나 시도하는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해도 삶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감정은 삶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시야를 가로막는다. 결국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탈출하고 고통을 멈추는 유일한 길은 죽음뿐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한다. 자살을 시도하는 그 순간만은 그들에게 자살은 선택지가 아닌, 현실의 고통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선택지가 없다고 느낀 사람에게 '선택'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절한가?


p.171 사람들은 흔히 자살로 세상을 떠난 사람은 이기적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자살을 선택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러한 편견을 강화시킬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이기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스스로가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짐이 된다고 생가가흔ㄴ 경향이 매우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내가 사라지면 짐을 덜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172 자살을 선택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고인은 물론 자살 유가족들까지 낙인찍는 일이다. 실제로 자살 유가족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질문이 바로 "고인이 왜 자살을 '선택'했는지 묻는 것"이라고 한다. 유가족 중에는 낙인으로 인한 수치심과 죄책감 때문에 다른 사람과 교류하기를 꺼리고 고립되는 경우도 많다.


p.173 (...) 자살만은 '죽음'이 망자의 '삶'을 압도해 버린다고. 가령 누군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뿐 아니라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떠올리며 삶 전반을 기린다. 아마 대부분의 죽음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유독 자살로 사망할 경우 그 사람의 삶 자체보다는 죽음에 초점을 맞춘다. 사랑하는 이를 자살로 잃은 슬픔만으로도 벅찬 유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극단적 선택'이란 표현은 지향해야 한다.


p.174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는 나라임에도 이 중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논의하기보다는 덮기 급급했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용어도 어찌 보면 자살을 직시하지 않고 외면하거나 우회하려는 자세가 반영된 신조어일지 모른다. 이제는 자살에 관해 떳떳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자살을 '자살'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반복되는 자살은 우리 정신 건강의 현주소다.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지 않는 이상,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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