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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엄마 지니 Oct 17. 2023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유레카'


미라클 모닝을 영어책으로도 사서 읽고 한국말책으로도 읽고 따라 해 봤는데 결론을 내리자면 내게는 맞지 않다. 하지만 요즘은 새벽에 일어나는 대로 내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일어나게 해 주시는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벌떡 일어나서 미지근한 물을 한잔 마시고 이렇게 책상에 앉는다. 막내가 쓰던 큰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면 마음이 좋다. 째진다고 해야 할까. 내가 꼭 뭐라도 된 기분이 든다. 오늘은 <새삥>의 기분이 째져, 도 들어봐야겠다.


어제 동생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언니, 안 그랬으면 언니 공부 안 했을 거잖아."


"응. 나는 공부를 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야. 많.. 이.. 공부 안 좋아하는 사람."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저 사람 공부 못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나는 엄한 어머니 밑에서 자라서 공부를 못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전교에서 등수가 오를 정도로 공부를 잘하지도 않았다. 사실 공부 욕심이 없는 사람이 무슨 그렇게 열심히 공부할 일이 있었겠나 싶다. 


하지만 나는 궁금하면 그 답을 찾으려 파고 파고 또 판다. 그래서 그 답을 알 때까지 엉덩이 무게로 앉아 있는다. 이해가 안 되면 될 때까지 읽고 또 읽는다. 그리고 어디에 꽂히면 그 부분이 이해가 될 때까지 찾고 찾고 또 찾는다. 그래서 답을 찾으면 그때는 '유레카~'라고 속으로 '아싸~ 이거지. 이 답이었어'라고 생각하며 희열을 느낀다. 그 답을 찾고 보면 생각보다 심플할 때가 많다. 그리고 내가 찾아낸 걸 기특해하며 기분이 날아갈 듯 좋다.


내가 대학원에 들어간 이유를 사람들이 들으면 픽~ 하고 웃을지, 아니면 아 저 오기 대단하다,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상황에 닥쳐본 사람만이 그 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예전에는 활명수를 가슴에 누가 훅 뿌린 듯 화했다. 그걸 사람들은 '화병'이라고 하던데 대학원에 들어가고는 두 다리도 다 뻗지 못하고 자던 걸 이제는 쭉 뻗고 잔다.




예전에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내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실까, 를 생각해 봤는데 앞뒤 맥락을 말하지 않으니 그렇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공간에 어제 쓴 글에 덧붙여 보충하고 싶은 글을 이렇게 써놓는다.



우선 '논문'에 관해서.

논문은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잘해야 된다는 의미는 아래와 같다.


논문은 내가 아는 부분의 최대한 분야를 작게 해서 그 부분만 적어야 한다. 안 그러면 꽤 복잡해지는 게 '연구방법'에서 갈피를 못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질문으로 시작된 모집단 추적? 연구. 제주도로 저기 남쪽 어디로 모집단을 찾아 나섰어도 엎어졌다. 연구방법을 들고 오라는데 연구는 추측으로 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집단이 마음이 바뀌어서 연구를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든 생각은 내가 생각하는 그 모집단이 아닐 수도 있어서 아예 연구를 시작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 그럼 다 쓰고 엎어지면 그것만큼 억울한 게 없을 테니까.. 보통 연구는 결과 예상하고 추적다.


바뀌신 지도교수님이 내가 '공부 스트레스'로 시키지도 않은 선행연구를 해오니 "졸업 안 하고 싶어요?"라고 물으셨다. 그때를 생각하면 와.. 다시 추억하고 싶지도 않지만.. 머리가 하얘진다.


연구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마구 쓰는 공간이 아니다. 연구는 최대한 분야, 범위를 좁게 써야 다. 책이랑은 상당히 다른 부분이다. 책은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고 내가 담고 싶은 대로 담으면 되는 게 책이 아닌가.


그다음으로 '목차'

한국책과 외국책의 글쓰기 방법에 대한 책들은 조금은 다른 것 같다. 한국 vs 외국이라는 틀보다, 사람마다 개인차인 것 같다. 방법론 책들에는 방법론을 많이 적는다. 방금 책장에서 꺼내 든 책들을 보니 '목차'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는 없다. <책 한번 써봅시다>, <끝까지 쓰는 용기>는 그렇다.





아이들에게 이런 고민을 했을 때 아이들은 내게 이런 조언을 해줬었다.


"엄마! 책이요. 모든 책이 목차를 갖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더라구요. 그냥 풀어서 쓴 책들도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책을 읽어보세요."





큰 아이가 추천해 준 책이 <완벽한 아이>였다. 다시 목차를 훑어보더라도 큰제목, 작은 제목으로 몇 꼭지로 나눈 자국은 없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해준 내가 쓴 글에 조언'


"엄마의 글에 이 이야기, 저 이야기가 있어요. 내용을 하나씩 보면 다 좋거든요."


"아 그래?"


내가 쓴 내용들이 좋단 말이지.. 음..


예전에는 그런 말을 듣지 못했다.. 세상 심각하게 내 글을 읽던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글 쓴 걸 보여줄 때면 얼마나 긴장하고 아이들의 피드백을 받았는지 모른다. 글쓰기가 나에게 그만큼 간절 것이긴 한가보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이 말이 사실이었구나..



그래서 내가 낸 결론은, 좋은 이야기는 책에 써먹자라고 해서 내 보관함에 넣어 뒀다. 사람마다 나만 알고 있는 그런 보물 같은 이야기가 있으니까.


나는 그래서 나누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큰 아이는 사람마다 경험치가 달라서 모든 이야기가 같다고 말할 수 없고 타자가 이야기를 쓸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럼 나는 '네가 세상을 너무 좋게만 보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내 속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주변 케이스들을 차근차근 설명해 준다. 그럼 조금 이해가 되다가도 여전히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한국사람들, 아니 한국 사람들이라고 한정 지을 수는 없지만 '표절'이 참 난무한 세상이 아닌가. 내가 쓴 것인 양, 내가 경험한 것인 양. 논문을 쓰는 사람들은 표절 심의에 걸리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안 그러면 수십 권, 수백 권을 보고 정리해 놓은 선행연구들과 힘들게 짜놓은 연구방법이 다 엎어져버린다.


sns의 글을 보면 불펌금지가 있는 글들이 있다. 도용금지. 그걸 쓴 사람들이 누구일까 쭉 내려가서 보면 교수들일 경우가 있다. 그것도 100프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내가 봤을 때는 그랬다.


이제 아침이 되었다. 오늘은 서점에서 내게 선물로 준 책을 읽는데 어려운 콘셉트들이 있다. 빨치산.. 사회주의.. 주변에는 재밌다고 해서 보기 시작한 건데 이런 게 재밌다니.. '재미'라는 뜻이 여러 의미를 내포한다는 걸 오늘도 느낀다. 그래도 읽어야지 한다. 나에게는 다른 재미로 다가올 테니까.



출처: @sky.zzal
출처: @zafancychild
출처: 바타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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