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마음의 소리 "내버려 둬요."
교육의 근본적 의미
Let it be.
그냥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둬. 내버려 두세요. 순리에 맡겨요.
우리는 아이들에게 '교육'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공부해라. 공부 좀 해!"
그리고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교육을 "잘" 시키길 바라고 원한다. 그러한 부모의 바람으로 오프라인 서점들과 온라인 서점들에서는 수많은 부모들을 위한 교육책들과 육아책들이 존재한다.
교육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시절 어느 행정 교수님은 이런 단어들을 칠판에 써주셨던 기억이 난다.
"부모", "학생", "교사", "행정".
위의 모든 것이 엇박자가 나기 때문에 이런 교육 과열 현상이 일어난 것이라 강조하셨던 기억이 선명하다.
우리나라의 교육 문제들은 대학의 서열화, 사교육비, 평준화 문제, 비교과, 정시, 수시, 학원가 위주로의 집값 상승 등이 대학을 들어가기 위한 준비 과정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라는 건 누구나 알 것이다.
이렇게 살인적인 교육환경에서 공부한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다시 무한 경쟁에 돌입한다. 취업준비를 위해서 자신의 적성이 맞는지 고민할 겨를도 없이 말이다.
<세바시>에서 김누리 교수님은 '헬조선'이라는 말도 하시면서 우리나라 교육을 한없이 비판한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왜 아직까지 아이들이 다니는 교육 현장은 바뀌는 것이 없을까?
배우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무한 경쟁을 하고 또 해야 할까?
인간은 타고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배움' 활동은 지속되고 있다. '배움이 곧 호흡'인 이유는 숨 쉬며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누구라도 배우기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또 여러 sns에 글을 나누는 것은 배움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공감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글은 힘없는 사람이 쓰는 것이라고 말한 강인국 선생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어 이렇게 배우고 생각한 바를 조금씩 써내려 가고 있다.
과연 배움의 본질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로 "배우다"는 '새로운 지식이나 교양을 얻다, 새로운 기술을 익히다, 남의 행동 또는 태도를 본받아 따르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학습과 공부가 대비되는 점은 학습은 외부적인 교육이나 현상에 대해 영향을 받는데 비해 공부는 자발적인 면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위의 의미로 보아도 우리는 자발적인 공부보다는 외부 입력에 의한 학습을 받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마도 나의 어릴 적 배움의 경험이 '공부가 재미없다, 좋지 않다'라는 마음이 더 강하게 드는 것일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우리 아이들은 어떠할까?
배움학에 관한 연구에서, '교육'은 부모가 자식을 따뜻하게 안아주듯 사랑과 관심으로 기르는 것으로 설명한다. 교육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편안한 환경에서 사랑과 관심을 통해 능력과 잠재력을 발현시키도록 도와주는 의도적인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과연 우리는 편안하고 따뜻한 사랑과 관심으로 학교와 학교 밖에서 교육을 받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사춘기 시절은 학교 교사들의 체벌이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학교 내에서 그렇게 하면 큰일 날 것이고 또 그렇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겠지만, 일부에서는 체벌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학원에서는 아이들이 집중을 하지 않을 때는 일부러 욕설을 하고 강하게 말해야 아이들이 더 집중을 한다고 한다는데 참 기가 막히는 일이다.
《강원국의 글쓰기》에서도 우리나라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다. 강선생님은 <호기심이 많던 어린아이는 어디 갔을까>에서 아래와 같이 설명해주신다.
학교에서건 직장에서건 질문하기를 꺼린다. 왜 질문을 안 할까. 대부분이 주위 사람 눈치를 본다. 나대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중간만 가자는 심리다. 가장 심각한 것은 궁금한 게 없다는 점이다. 그저 받아 적기 바쁘다.
질문하라고 하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어려서부터 질문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질문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주입식 교육을 받았다. 질문하는 공부가 아니라 정답 맞히는 공부를 했다.
우리는 이렇게 공부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없는 그러한 환경에서 공부를 한 것입니다.
교육하다(educate)라는 뜻은 educare, 그리스 어원으로 "to draw out potential which already within him/her"이라고 한다. 이 뜻은 이미 한 사람에게 내재된 잠재된 능력을 스스로 뿜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랫사람에게 특정한 내용을 주입한다는 것보다는 아랫사람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내부의 것, 즉 잠재력(potential)을 바람직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보호한다는 의미가 크다.
교사는, 잠재력이 발현되도록 돕는 촉매자 역할을 해야 하는데 나는 아이들을 키우며 특히 중학교에 가서는 이런 교사를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신기하게 아이들은 교사와 선생님으로 나눠서, 좋아하는 분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이건 많은 사랑을 주신 선생님들께 부르는 아이들의 마음속의 선물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나라의 지금 현재 교육은 가르치는 일에만 초점을 둔 채, 성숙한 교수자가 미성숙한 학습자에게 정해진 교과내용을 전달하는 과정으로 왜곡되어 사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마치 동물원에서 조련받는 동물처럼 사육사의 주도면밀한 가르침을 따라 배우는 교육환경이라고 심하게 말하기도 한다.
교육학에서 자주 인용되는 '교육'이라는 말은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 사이의 일련의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배우는 것이 이런 상호작용이라면, 청소년 자살률이 급격히 높아지고 중2병이 심각한 병으로 대두되며, 초등학교 4학년이 우울증에 걸리는 현 교육 현실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체인지 9의 최재붕 교수님은 아래와 같이 강조하신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정형화된 인재, 조직 사회에서 잘 적응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 시스템을 만드는 데 주력해왔고 지금까지 매우 성공적으로 발전시켜 왔습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평균적인 학업 성취도는 선진국 대비 상위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인이 된 이후, 이를 더 크게 발전시키지 못한다는 것이죠. 대부분 어려서부터 정해진 지식을 습득하고 암기해 시험으로 평가받는 데 익숙해 있기 때문에,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해야 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여전히 학교와 학원에 갇혀 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에 가둬두는 것은 우리의 기본적인 의식이 과거의 관습에 갇혀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최재붕 교수님은 아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암기를 통한 평가방식 때문이라고,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에 갇혀 있다는 표현도 서슴지 않고 사용하신다.
교육은 아이들이 이미 갖고 있는 내재된 잠재력을 발현하는 것을 돕고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정상적으로 또 효과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면, 아이들이 화가 나고 공격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며 우울하기도 하며 아프기도 한 교육 현실은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만 책임이라 할 수 없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니 부모의 책임도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