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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도슨트 임리나 Nov 07. 2020

죽어서 기억되기보다 살아서 잊혀지고 싶다

암 치료 종료 그 후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코로나가 창궐하던 때 암 수술과 치료를 보내고 다시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거리두기 단계도 내려갔을 때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고맙게도 내가 암에 걸린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오랜만에 만났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심지어 상황을 아는 사람도 살도 빠지고(다이어트 성공자처럼)얼굴도 좋아졌다고 한다.

어쩌면 외부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그렇다면 치료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도 이렇게 다시 일상을 산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건지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다시 한번 느끼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전부가 아니다.

정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지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미 내 인생은 암이 걸리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그 누구보다 내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샤람들에게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나의 속사정이 있다.


가장 내가 힘든 신체적 증상은 화장실을 자주 간다는 것이다.

얼마나 자주인지 수치상으로 말하자면 많게는 하루에 10번, 적게는 3-4번이다.

내 추측이지만 대장(직장)의 일부가 잘려나갔으니 정상적인 기능이 될 리가 없는 게 맞고 또 차차 좋아지고는 있지만 정상적이었던 과거로의 회귀는 어렵다는 것이 객관적 사실이다.


정말 다행인 건 자율신경인 대장이 밤에는 잠을 잔다는 것이다.

덕분에 잠을 잘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당연히 그래서 외출에도 영향을 받는데 예전 같으면 20-30분 거리는 코앞이라고 생각하고 다녔지만 이젠 최대 이동거리가 되어 버렸다.


2시간쯤의 운전은 너끈하게 다녔지만 이젠 몇번을 생각하고 나가기 전에 화장실을 들르는 둥 벼르고 별러 출발을 해본다. 그것도 최근에는 거의 없다.


그나마 또 다행인 건 집 앞 작은도서관장이다 보니 사람들이 날 만나러 오기가 부담이 없다는 것이다.

부르는 나도 집이 아니니 편하고 오는 사람들도 도서관이다 보니 겸사겸사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년에 작은도서관장이 된 건 내가 계속 사회적 끈을 가질 수 있게 한 ‘신의 한수’가 아니었을까 싶다.


직장이 바로 집 앞에 있는 셈이고 또 열심히 도와주시는 분도 있어서 시간적으로도 자유롭다.

물론 시청과 아파트 예산을 쓰다보니 공적으로 꼭 처리를 해야하는 일들이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남들이 모르는 나만이 고충은 ‘피로감’이다.

아프기 전에도 나이 들어 체력이 떨어진다는 등, 아이를 기르느라 힘이 든다는 등의 피로감은 있었지만 지금의 피로감은 상상이상이다.


그래서 되도록 스케줄 없이 많이 쉬고 싶지만 맘처럼 그렇지 못하다.

이제 8살인 아이의 스케줄은 곧 나의 스케줄이라 내가 누워 있으려면 아이를 방치해야 하는데 때리는 엄마보다 누워 있는 엄마가 더 나쁘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아이를 챙기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너무 벅찬 일이다.

물론 내가 최소한의 에너지로 움직이기 위해 학원, 온라인 수업, 방문 수업 등등을 배치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쉽게 내가 누워 있을 수는 없다.


지금은 그저 과거에 내가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하고 살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다 그러니 병이 났지...라고 끄덕이다 하루가 간다.


치료가 종료되면 그 이후 관리는 오로지 개인의 몫이 된다.

요양병원에 있었을 때는 기숙사처럼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건강관리를 하기 쉬웠다.

물론 그 중에도 잘하는 사람, 못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환경이 갖추어진 셈이었는데 이렇게 일상으로 돌아오니 건강을 위해 따로 시간을 빼기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그 와중에 내가 하고 있는 건 abc주스 마시기, 영양제 챙겨먹기, 일주일에 한번 비타민 주사맞기 등인데 이것마저 쉽지 않다.


6개월 추적 검사가 마치 기말고사처럼 생각되는데 그 검사에 이상없다고 나오길 바라면서도 적극적으로 건강관리를 하는 일에는 에너지를 쏟지 못하니 답답하기만 하다.


나는 주변 사람들 혹은 sns에서 보는 사람들이 나의 아픔을 알아준다거나 동정해주기를 바라기 보다 그저 예전의 평범했던 교류가 그리울 뿐이고 그 정도의 관심이면 감사하다.

요즘 내가 생각하는 말은

죽어서 기억되기 보다 살아서 잊혀지고 싶다

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예전과 다름을 아주 조금은 배려받고 싶다.

이게 솔직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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