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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도슨트 임리나 Oct 28. 2019

육아와 함께 시작된 건망증

내 아이 바보일까? 천재일까?

아이가 3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이 때는 혼자 아이를 데리고 외출을 어찌해야 하는 건지 생각조차 못할 때였다.

아이를 데리고 언제 외출이 가능한지 명확한 가이드라인도 찾지 못했거니와 도대체 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어찌 나가는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일한 외출이란 예방접종 때 집에서 5분 거리의 소아과가 전부였는데 그것도 혼자가 자신 없어서  차로 한시간 반이나 걸리는 먼 곳에 사는 아버지를 불러서 같이 가기도 했다.


그런데 슬슬 나에게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나.가.고.싶.다.


거의 일주일을 집에만 있는 경험을 하게 되면 집이 아니라 감옥처럼 느껴졌다.

진짜 육아란 감옥에 갇혀서 졸릴 때마다 방망이로 두드려 맞는 형벌 같다고 표현한 것에 동감이 가기도 했다.

그림 by 피오나

그래서 나는 용기를 냈다.

그 용기란 집 아래에 있는 순대국집에서 순대를 사와서 먹는 것이었다.

물론 배달 음식을 시키면 되었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건 먹는 것보단 외출이었기에 아주 큰 맘 먹고 외출을 하기로 했다.


우리 집은 산꼭대기에 있어서 유모차를 밀고 내려갔다 올라온다는 게 또 쉽지만은 않았다.


애가 없을 때 공기 좋은 곳에 살자고 일부러 산쪽으로 얻은 아파트가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우리 아파트만 빼고는 다 평지나 다름없었는데 하필이면 우리 아파트만 오르막길이 심한 곳이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아이를 유모차에 실고 산 아래 순대국집에 갔다.

고작 집 아래 동네로 내려왔을 뿐인데 아이가 없을 때 파리의 상제리제를 걷는 것처럼 먼 여행지의 길을 걷는 느낌이었고 그만큼 기분도 업되어 있었다.

그리고 카페라도 들러볼까? 하는 중에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었으니......!!!


내가 국을 데운다고 가스불을 켜놓고 내려온 것만 같은 느낌이 뒷통수에 묵직하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정말 힘들게 외출해서 고작 모듬 순대를 샀을 뿐인데 빨리 집으로 돌아가봐야할 것 같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계속되는 오르막길에다가 몇번 밀어보지 못한 유모차라 너무 무겁기만 했다.

상제리제에서 여행 가방을 끌고 걷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희한하게 유모차는 아이가 커갈수록 가볍고 잘 밀게 된다. 아이는 무거워지는데 말이다. 엄마 인체의 신비처럼.


어떻게 집에 도착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무거운 유모차를 밀며 계속되는 오르막길을  뛰다시피 올라왔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어보니 가스불을 켜 놓은 게 맞았고 다행히 큰 냄비라서 국물이 쫄아붙기 시작한 타이밍이었다.

만약 가스불을 켜놓은 것을 까먹고 카페에서 몇 시간 머물렀다면 오늘 돌아올 집이 없을지도 몰랐다.


아이를 키우며 깜박깜박하는 건망증은 시작에 불과했고 그 후에 까먹는 일들은 비일비재했다.

아이가 없을 때는 지갑 한번 잃어버린 적이 없는 나는 아이사랑 카드를 3번은 잃어버려서 계속 재발급을 받아서 어린이집 결제 타이밍을 간신히 맞출 수 있었고

아이가 없을 때는 모든 스케줄은 내 머릿속에 정확히 입력되어 있었는데 아이가 생기고는 스케줄을 적어 놓고도 잊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데 다행인 건 엄마들끼리는 이런 상황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육아와 함께 시작된 건망증은 나이와도 상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나이가 많아서 혹시 치매인가도 생각했지만 이십대의 어린 엄마들도 자꾸 뭔가를 까먹는 걸 보면 육아와 건망증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다.


이런 나를 보고 동생이 한 말이 있다.


아이를 낳아서 건망증이 생긴는 줄 알았더니 언니를 보니 아니네!


맞다. 보통 엄마들은 아이를 낳고 머리가 나빠졌다고 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심지어 제왕절개를 할 때 마취를 해서 머리가 나빠진 것 같다고도 한다.

대부분은 출산과 육아를 세트로 경험하게 되지만 나처럼 출산을 하지 않고도 육아를 하며 건망증이 생기는 걸 보면 건망증은 육아 때문에 오는 거라는 걸 증명할 수 있다.


이런 건망증이 생기는 원인은 정말 간단하다. 집중의 대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떤 것에 의식의 촛점을 맞추는 순간 다른 것은 뇌에서 사라진다.  

엄마의 건망증은 그만큼 아이에게 관심을 쏟고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아이만 안 잃어버리면 되지'하면서 엄마의 건망증을 위로하지만 때론 아이를 잃어버리는 일도 생기기도 한다.

어쩌면 그 유명한 영화 '나홀로 집에'에서 아이가 혼자 집에 남는 설정은 엄마의 건망증에서 오는 거고 또 그렇게 됐을 경우 우여곡절을 겪지만 아이와 무사히 재회하는 것은 엄마의 바램이 아닐까.    


그리고 7살이 되어보니 아이가 스스로 챙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제 어린이 문화센터에서 놀고 주차장에 내려왔는데 아이가

'엄마 이거 주고 와야지'

하며 목에 건채로 깜박 잊고 내려온 출입 카드를 가리키는 게 아닌가.

다행히 아이 덕분에 다시 데스크에 가서 반납하고 올 수 있었다.


엄마의 건망증은 아이의 기억력을 키울 수 있다.

아니면 아이의 기억력은 엄마의 건망증을 먹고 자라나는 것일까?


내 아이가 바보일까? 천재일까? 의심스러운데 나마저도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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