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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도슨트 임리나 Jan 14. 2024

그날 밤, 아무 일 없었던 <별>을 다시 읽기

알퐁스 도데의 <별>

비제의 <아를의 여인>

오늘은 비제의 <아를의 여인>이라는 음악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https://youtu.be/pY3kKtYMS9o?si=yWoeP-B26yHYLV2r

앞부분만 들어봐도 익숙한 곡이다.

비제의 곡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 곡은 우리에게 <별>로 유명한 알퐁스 도데의 동명의 소설  <아를의 여인>을 연극으로 만들며 작곡된 음악이다. 

'아를'이란 지역은 남프랑스이며 알퐁스 도데의 많은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별>, <마지막 수업> 등의 배경도 남프랑스의 시골이란 것을 생각하면 알퐁스 도데가 전원에서 목가적인 생활을 했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어쩌면 그래서 더 자신의 고향에 대한 향수 어린 작품을 썼을 수도 있다.


<아를의 여인> 줄거리를 알아두면 <별>이란 작품을 이해할 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소설은 화자인 '내'가 마차꾼에게 어떤 가족의 얘기를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장이라는 청년이 투우장에서 한 여인을 보고 사랑에 빠져 결혼하기로 했는데 한 사나이가 찾아와서는 그 여인의 자신의 정부였다고 아버지에게 말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만 이 사실을 알려준다. 아들은 그 얘기를 들었음에도 마음을 바꿀 수 없고 또 그 사실을 공표하자니 자존심이 상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포기하고 괜찮은 듯 보였으나 결국 그녀를 잊을 수 없었던 장은 자살을 하고 만다. 


이 내용의 연극을 상연하면서 비제가 곡을 붙였는데 연극은 크게 인기를 끌지 못했고, 음악만이 나중에 편집이 되어 히트했다고 한다. <아를의 여인> 중 <파랑돌>은 우리에게는 <비정상회담>의 오프닝곡으로 익숙하다.




 <마지막 수업> -원래 독일의 땅이었다고?

<별>만큼이나 유명한 <마지막 수업>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프랑스어로 하는 마지막 수업이라는 내용으로 우리에게는 일제강점기 한국어로 수업을 하지 못했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대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의견도 많다. 마치 우리는 이 소설에서 독일이 프랑스를 다 점령하고 일체 프랑스어로 못 쓴 것으로 확대해석하게 되는데(우리의 경험 때문에) 실상은 원래 독일의 땅이었던 알자스와 로렌이 프랑스에서 독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자면 일제강점기가 된 이야기가 아니라 일본에서 해방되어 더 이상 일본어를 쓰지 않는다는 전혀 반대의 상황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를 떠나 나는 작가 알퐁스 도데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춰보고 싶다. 그렇다면 알퐁스 도데는 '학교'에 관한 소설을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가 궁금했다. 그래서 알퐁스 도데가 선생님이었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내 예상대로 알퐁스 도데는 선생님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정식 선생님은 아니다. 자율학습을 감독하는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알퐁스 도데의 이야기는 자전적 소설 <<꼬마 철학자>>에 잘 나온다.



http://aladin.kr/p/OUe8k

<<꼬마 철학자>> -알퐁스 도데의 자전적 소설

앞에서 말한 대로 알퐁스 도데는 목가적인 시골에서 별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소설을 쓰는 작가는 아니었다. 사업을 하던 집안이 망한 후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알퐁스 도데는 자습감독 선생님이 된다.

알퐁스 도데에겐 자끄라는 형이 있었다. 집 안에서 형보다는 똑똑하다고 생각되는 알퐁스 도데를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보내지만 집안 사정으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학교를 다닌 경력으로 자습감독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때의 경험으로 <마지막 수업>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알퐁스 도데는 이 학교에서 짓궂은 학생 때문에 상당히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체육 선생님의 부탁으로 연애편지를 대필했는데 대필로만 그치면 좋았을 것을 대필을 하면서 체육 선생님이 아니라 자신의 정보, 감상들을 쓰다가 그 여인이 군수의 하녀였고, 군수는 그 사실을 알고 화가 나서 알퐁스 도데를 만나러 오기까지 했다. 알퐁스 도데는 원래 그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체육 선생님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제 발로 그만둔다. 

그리고 마침 그때 파리에서 후작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형이 파리에서 같이 생활하자는 편지를 보내고 도데는 형에게로 간다. 이때부터 형은 도데의 전폭적인 지원자가 된다. 일하지 말고 오직 시만 쓰라며 밤에는 촛불도 넉넉히 쓰라고 한다.

그러나 형의 지원을 받아 글을 열심히 쓰고 성공하면 좋으련만,  무명작가로 시집을 낼 수 없자 형이 자비 출판까지 해주지만 도데는 여인과 사랑놀음에 빠진다. 

어쩌면 이 자전적 소설은 도데의 불행한 십 대, 방탕했던 이십 대의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소설로만 접했을 때 가졌던 작가에 대한 이미지와 다르다는 것, 그렇지만 왜 그렇게 프랑스 시골 마을에 대한 이야기들을 썼는지 알 수 있다.

다만 소설이 이십 대에서 끝나고 있기에 그 후, 알퐁스 도데가 어떤 노력으로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십 대와 이십 대는 도데의 이야기로 생생하게 알 수 있다. 


  


<별>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다

양치기 소년이 주인집 소녀와 목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이야기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프랑스 단편 소설>이다. 더구나 주제는 '순수한 사랑'이라고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간단히 지나치기엔 많은 의문이 들어 다시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우선 제목이 <별>이 아니다. 정확히는 <별들-stars>이라고 한다. 그래서 <<별들>>로 번역한 책도 있다.

http://aladin.kr/p/51TDs 

원제에는 '프로방스 지방, 어느 목동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고 한다. 

소설의 시작을 보면 시제가 과거다. 그러니까 이 소설이 쓰이던 시점에서 이야기는 더 과거의 일이다. 그러니까 화자는 소년이 아니라 중년쯤에 회상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 설정을 들으면 이 소설의 '순수성'이 이해가 된다. 과거를 아름답게 회상하는 그 기분인 것이다.


그리고 여주인공은 '아가씨'다. 소녀가 아니라 '아가씨'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시대에 이 소설을 소년과 소녀의 사랑쯤으로 해석한다면 1800년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신분제가 엄격했던 그때, 양치기와 주인집 아가씨는 결코 가까이할 수 없을뿐더러 평등할 수 없는 관계다.

실제 소설에서도 양치기는 존댓말을, 아가씨는 반말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는 없어졌지만 그 당시 흔히 있는 양치기라는 직업은 자신의 양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양의 주인이 따로 있고 고용되어 양을 관리한다. 양을 그렇게 많이 가진 부자가 직접 양을 관리할 리는 없지 않은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군수의 하녀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학교 선생님을 쫓겨나는 시절이었으니 양치기에게 주인집 아가씨는 아주 먼 존재였을 것이다. 저 멀리 하늘의 '별'처럼 말이다.

소설 중에 아가씨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도 있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의 묘사는 얼마나 그녀의 신분이 높은지에 대한 묘사일 수도 있다.

소설 속 양치기가 아가씨를 별로 은유한 것은 '반짝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어쩌면 '닿을 수 없는 너무 먼 거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제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참고로 양치기가 아가씨에게 해주는 별자리 중에 '세명의 왕'이라는 별자리 이야기가 있는데, 처음에 소개한 <아를의 여인>의 전주곡이 프로방스의 민요 <We three kings>라고 한다.


이제, 알퐁스 도데의 <별>을 다시 읽어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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