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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도슨트 임리나 Jan 21. 2024

인생 영화 <패왕별희>를 원작 소설로 다시 읽기

<<사랑이여 안녕>> 릴리안 리, 영화 <패왕별희> 원작에 대하여

창녀에겐 정이 없고,
배우에겐 의리가 없네.
창녀는 침대 위에서만 정을 주고,
배우는 무대 위에서만 의리를 지킬 뿐이네.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이 있다.

홍콩 작가 李碧华(이벽화: 영문명, 릴리안 리)의 <<사랑이여 안녕>>이다. 

영어 제목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인데 영어로는 'Farewell My Concubine'이다. 직역하자면 '안녕 첩이여'란 뜻인데 중국어 '패왕별희'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니 결국 '사랑이여 안녕'은 '패왕별희'와 같은 뜻이 된다. 즉 패왕별희의 원작 소설의 시작 부분이다. 


<패왕별희>는 장국영이 나온 영화로 정말 유명하다. 

장국영이 이 영화에서 여장 남자 배우(성정체성까지는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역할로 호평을 받았는데 나중에 실제 장국영의 성정체성이 알려지며 이 영화의 연기가 연기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것과 또 만우절 날 거짓말처럼 자살을 했기에 장국영은 박제가 되어 불멸의 스타로 남게 되었다.


물론 영화만으로도 훌륭하지만 나는 원작 소설을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그러나, 문제는 원작 소설을 구하기 어렵다. 도서관에도 잘 없을뿐더러 중고가는 10만 원이 넘는다. 


영화에서는 결말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나 또한 영화의 마지막을 보면서 과연 둘이 어떻게 되는 걸까 많이 궁금했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는 둘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결말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는 정말 많이 울었다. 

주인공 둘 중에 누가 죽은 것도 아닌데 새벽 3시에 꺼이꺼이 울다가 잠이 들고 말았다.

내가 그렇게 슬펐던 이유는 이 소설의 앞부분에서 다 설명되었다는 걸 마지막을 읽고 알았다.


소설의 주인공은 ‘두지’(장국영)와 ‘시투’(장풍의) 두 배우와 '주샨’(공리) 창녀이다.

이 세 명이 중국의 근대에서 현대를 거쳐온 이야기다.

그리고 중국의 근대사는 우리의 역사와 많이 닮았고 어쩌면 그 시대의 식민지는 비슷한 운명을 겪었고 그것이 세계사라는 생각을 했다.


소설의 시작대로 결과적으로는 두 배우는 의리를 지키지 못했고 시투의 아내가 되었던 주샨은 정을 지키지 못했다.

그것은 이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중국의 일본 지배를 받았고, 일본이 떠난 후에는 공산당이 들어섰고, 문화혁명이 일어났다. 

두 배우는 연기만 했을 뿐인데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의리를 지키지 못한 혹독한 대가를 받아야 했고 나중에 서로의 의리마저 지키지 못한 꼴이 됐다.

주샨도 마찬가지다. 창녀를 그만두고 평범한 가정생활을 꾸리고 싶어 했지만 남편인 장풍의가 정치적 고문을 받고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이혼'이란 말을 꺼내자 자살을 하고 만다.


영화에서는 잘 나오지 않지만 소설에서는 중국의 공산당이 들어서고 문화 혁명 이후에 두 배우의 삶들이 자세히 나온다.

처음에는 월급이 보장되는 시스템이 좋았다. 그러나 작품은 자유롭지 못했다. 당의 선전을 하는 작품에 부정적 의견이라도 얘기한다면 반동분자로 낙인이 찍혀 처벌을 받는 일이 흔했다. 그리고 노동을 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공장에 보내지기도 했다. 


이 시기에 영화에는 나오지 않고 소설에서만 나오는 사건이 있다.

어린 시절 육손이라 배우가 될 수 없다는 사부의 말에 두지의 엄마는 두지의 손가락을 하나 잘라 입단을 시켰다. 

그런데 두지는 문화혁명 후.  공장에 보내졌다가 기계에 손가락이 하나 절단되어 결국 9개의 손가락이 된다. 이젠 손가락이 하나 적어서 경극을 못하게 되고 배우들의 분장이나 봐주는 역할로 전락하게 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작가의 이런 설정에 놀랐다. 쓸모없다고 잘랐던 손가락이 결국엔 잘릴 운명이었을지도 몰랐고. 하나 잘라서 정상이 되었는데 다시 또 하나가 잘려서 비정상이 되는 것이 우리 인생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의 마지막에 두 사람은 홍콩에서 재회한다. 

영화와는 다르게 두지(장국영)는 결혼을 했다고 장풍의에게 얘기한다. 이것도 아내를 잃은 쪽과 아내를 얻은 쪽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두지(장국영) 여장 남자 배우라는 설정을 명확히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다시 각자의 길로 가는(하지만 어딘지는 명확하지 않다) 것으로 끝이 난다.

마지막 문장도 멋있으니 꼭 기회가 되면 읽어보기를 바란다.


작가 李碧华(이벽화: 영문명, 릴리안 리)가 각본을 쓴 영화는 꽤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만리장성을 쌓다가 진흙 군인으로 불멸의 삶을 얻은 <진용>, 장국영과 매염방이 나오는 <연지구>는 동반자살을 하려다 홀로 살아남은 남자를 죽은 여자가 이생으로 와서 찾아다니는 내용이다.


영화와 소설을 보다 보니 작가는 '죽지 못하는 사람들의 슬픔'에 대해서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도 경극 <패왕별희>에서도 우희가 먼저 죽고 패왕도 나중에 자살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로맨스와 영웅의 이야기를 남겼다. 

그러나 패왕과 우희를 연기하는 현대의 장국영과 장풍의는 죽지 못한다. 

인생의 절정기도 있었지만 바닥까지 떨어지는 삶을 계속 살아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슬펐다. 죽지 못해 사는 이야기라서.


어쩌면 죽음이 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진용>이나 <연지구>에서 죽지 않고 산 사람들 쪽이 더 불행해 보였다. 그렇지만 죽지 않고 산다는 게 더 의미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닐까.


이벽화는 중국 무용을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작품에서 경극을 중요한 소재로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장국영의 경극 연기는 <패왕별희>가 처음이 아니라 <연지구>에서도 경극 배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패왕별희>는 우리에게는 '사면초가'라는 고사성어로 잘 알려진 중국 고대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로 만든 경극 <패왕별희>는 중국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소설 <사랑이여 안녕(패왕별희)>는 현대의 배우들이 경극을 연기하며 살아온 인생 이야기다.


이 소설의 주요 인물, 배우와 창녀, 그리고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떠올리면 최근에 일어난 사건이 떠오른다. 

스타로 추앙받는 그 배우가 선택한 마지막은 사랑과 의리를 지키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면서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더 나은 길이 아니었을까 나 혼자 생각해 본다. 


어쩌면 우리는 사람의 목숨이 파리의 목숨보다 못한 시절들을 용케도 지나온 것 같다.



이벽화 각본의 <진용>과 <연지구> 생과 죽음 사이의 로맨스가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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