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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우지니 Feb 06. 2023

여러 번의 시도

서른일곱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 그림을 그만둔 이후, 처음은 아니었다.


더 나은 내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진 사람처럼 치열한 대학 생활을 마친 후 더 치열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살았다. 조금이라도 '그림'이라는 접점이 있는 직업을 갖고 싶었다. 전공과 전혀 관계없는 실내건축기사 자격증을 땄다. 벽지와 커튼 색깔을 고르는 것도, 공간 배치를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박봉에 매일 밤새는 일이었지만 좋았다. 미래의 나를 위해 배우는 기간이라고 생각하며 매 도면을, 매 현장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렇지만 나를 살필 틈 따윈 없었다. 밤새고 두어 시간 자고 다시 출근해 캐드 도면을 그리고 밤이 되면 다시 백화점 현장으로 투입되었다. 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기억이 가물가물해졌다. 스물여덟. 결혼을 앞두고 인테리어 일을 그만두었다. 결혼한 여자가 현실적으로 계속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즈음 번아웃이 왔다.


결혼 후 집 근처 여성회관에서 하는 3개월에 채 10만 원이 안 되는 그림 수업에 등록했다. 중고나라에서 다른 사람이 쓰던 물감과 팔레트를 샀다. 설레었다. 붓을 놓은 지 10년이 훌쩍 넘었어도 내 안 어딘가에 감각이 살아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그 사이에 감각은 없어지고 만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복잡한 마음이 오갔다. 

십몇 년 만에 그리는 그림. 못 그리면 어떠한가. 그림을 전공한 것도 아닌, 결혼해 쉬는 아줌마가 그림 좀 못 그리는 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하지만 나에게 그림은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가슴 깊이 묻어 놓았던 단 하나, 공부는 못했어도, 뭐 하나 잘하는 것 없는 것 같아도 딱 하나, 잘하는 게 그림 그리는 것이라는 자부심이 가슴속 깊은 곳에 꼭 박혀 있었다. 너무 오래 박혀서 나조차도 잊을 뻔했던 것을 꺼내 보일 때가 왔다. 못할 리 없겠지만, 혹시나 있을 줄 알았던 보석이 이미 오래전 화르르 타 없어졌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 아닐까.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런 곳에 다녀본 분은 알겠지만 그 세계에는 고인 물이 주름잡고 있다. 이미 몇 년째 그 수업을 들으며 선생님과 친해진 어르신들이 자신의 작품을 들고 와 선생님께 보여 드리고 의견을 듣는다. 초짜 신입은 애당초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선생님께서는 수채화 책 한 권을 추천해 주셨다. 그걸 펴놓고 바위를 따라 그리라고 하셨다. 한 달간 바위 네 개를 따라 그렸다. 머리 위에 바위 네 개가 앉은 듯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잘 모르겠고 잘 못 그렸기 때문에 낙심이 컸다. 깊은 수렁에 빠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3개월이 되기도 전에 그만두었다.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엄마는 내 재능을 없앴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이건 이곳 시스템의 문제인지도 몰라. 선생님 한 분이 두 시간 동안 진도가 다 다른 스무 명 수강생을 봐주기는 힘든 게 당연하지. 게다가 초짜라니. 처음부터 하나하나 가르쳐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몇 년이 지나 만삭인 채 다른 화실에 등록했다. 거기서 나의 멘토 혜영 언니와 맘 좋은 언니들(이라기엔 50~70대)을 만났다. 10년 넘게 여기서 배우셨다고들 했다. 다른 분들의 유화 그림을 어깨너머로 보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선생님이 공사다망하셔서 안 계시는 일이 많았고 나의 그림은 서너 달이 지나도록 갈피도 못 잡은 채 흩날리고 있었다. 또 흐지부지 그만두었다.

그렇게 동네 화실 세 군데를 다니다가 채 몇 개월도 못 채우고 그만두는 사이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만둘 때에는 이유가 많다. 시스템이 마음에 안 들어서, 선생님이 세심하지 않아서, 같이 그리는 사람들과 정치 성향이 달라서(이런 일을 겪을 줄이야), 내 그림 위에 선생님 손이 닿으면 내 그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선생님 그림만 남아서...


그런데 사실은 더 깊은 마음속에 '죄책감'이 있었다. 결혼한 여자라면 알뜰하게 돈을 잘 모아야 하고 남편 보필을 잘해야 한다는 조선 시대 사람 같은 관념이 내 DNA에 새겨져 있었다. 안동 태생 진성 이 씨 나의 엄마 이여사는 대장부처럼 일을 하는 사람이었으면서도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 한다는 관념이 강한 분이셨다. 딸이 날라리인 것을 알았으면서도, 전화하면 늘 마지막 인사가 '홍서방 밥 잘해 먹여라'였다. 내가 '일하는 여자'일지라도 딸이 사위에게 밥을 따박따박 제시간에 안 해주는 것에 본인이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안 할 거야!'하고 소리를 빽 지르면서도, 하이킥으로 날려버리고 싶은 '죄책감'은 나도 모르게 내 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경상도 태생 시어머니인 박여사는 '여자가 남편 밥하러 시집을 온 것'이라는 소리를 내게 서슴없이 하는 분이셨다. 내가 버는 돈이 얼마인지 묻는 것은 물론이며 한 달에 얼마 저금하는지, 혹여나 내가 아들 돈을 물 쓰듯 펑펑 쓰는 건 아닌지 궁금해하셨다. 아울러 자기 아들이 아침밥을 어떤 반찬과 몇 시에 먹는지도 궁금해하셨다.


두 분 모두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고 있다. 아파도 결국 집안일의 대부분은 어머니들의 일이다. 배가 고프면 여자가 움직인다.


'집안일은 둘이 같이 하는 것'이라는 관념이 당연한 사람이면 저런 말에 '씁'하고 넘겼을 일이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울고불고 어떻게 저런 말씀을 하시느냐고 남편을 잡는 이면에, 나도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는 부분이 아주 없진 않았던 것이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보고 큰 것은 DNA에 각인된다. 어릴 적부터 봐온 게 있으니까 나도 어느 정도는 죄책감을 가졌던 것이다. 죄책감만큼의 분노가 솟았다.


내가 하고 싶은 취미인 '그림' 뒤에는 늘 죄책감이 있었다. 먹고사는 데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돈을 쓰고 있는 걸 알면 어머니는 뭐라고 하실까.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쪼그라드는 마음이 힘들어, 나는 얼른 내가 좋아하는 걸 놓아버렸다.



#죄책감 #미술 #그림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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