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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우지니 Feb 10. 2023

선생님

드디어 맞는 선생님을 만났다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써냈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그림을 몇 번이나 배우다가 그만두었던 것처럼 중간에 그만둔 것은 숱하게 많았다. 관심이 생기면 이미 수업이 신청되어 있는 대책 없는 타입이랄까. 공부 잘하면서 춤 잘 추는 애가 가장 멋져 보이던 나는 온갖 댄스 수업을 섭렵했다. 자꾸 나 혼자 반대편으로 움직여서 군무의 센터로 우뚝 서길 반복하다가 한 달도 안 되어 민망함에 그만두었다. 재봉틀도 찔끔, 피아노도 찔끔. 그렇대도 상관없었다. 나는 뭐든 시도하고, 아니면 포기도 빠르니까. 또 다른 걸 시작하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 내가 A4 100페이지의 글을 썼다니. 내 글을 출판하고 싶다는 출판사가 있다니!

집 앞 커피숍에서 출판사 대표님과 만나 서로의 도장을 찍었다. 기쁨에 걷는 걸음이 절로 나풀거렸다. 계약서를 들고 누가 부른 것처럼 집 앞 상가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림이 잔뜩 붙은 유리벽 앞을 잠시 서성이다, 미술학원 문을 열었다. 또다시 미술을 배우겠다고.


이제까지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화실이 아니라 나였다. 하다가 마는 건 이제 하지 않겠다는 다짐,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말든 이번엔 끝까지 하겠다는 의욕이 전장에 나가는 장수와 같았달까. 동네 화실에 취미 미술 하러 가면서 이다지도 장렬할 일인가마는, 몇 번이나 실패하고 좌절한 채 그림을 또 시작할 마음을 내기 쉽지 않았다.


밥벌이도 아닌데 돈을 쓰는 것에 대한 뼛속 깊은 죄책감과 겹겹이 쌓인 패배감.

그 위로 '용기'가 힘을 내기 시작했다. 뭘 하나 완성해 본 사람의 용기.






화실에는 세 명의 수강생이 있었다. 따뜻하고 재미있는 곳이었다.

선생님은 예중, 예고를 보내는 입시 미술 전문 수업을 주로 하는 분이라고 했다. 어린 학생들을 20년 넘게 가르치다 보니 미술 기초 커리큘럼이 만들어져 있었다. 6주간 기초 도형을 각 색깔로 칠하는 수업 후, 아아 수채화는 이런 것이었지, 하고 색 쓰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6주. 어릴 적 10년간 배운 미술 '감'이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6주간의 기초수업

지난 10년간의 좌절 후 다시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다시 용기 내어 그림을 배우러 간 내가 기특했다. 하필 그 학원이 우리 집 앞 상가에 있어서 이렇게 인연 된 것에 감사했고 같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너무 좋은 분들이라서 감사했다. 일주일에 한 번 이곳에 가는 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여러 화실과 여러 선생님을 거쳐, 나와 맞는 선생님을 만났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선생님과 상의해 가며 사진을 골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이 커서 붓 터치 한 번을 할 때마다 심호흡을 했다. 선생님이 시범을 보여주시면 그걸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했다. 나뭇가지에 달린 감 하나, 나뭇잎 위에 앉은 무당벌레 한 마리를 그리고도 내가 이렇게 잘 그린게 믿어지지 않아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자뻑 시간을 갖곤 했다. 지금 다시 열어보니 겁에 질려 잔터치를 겹겹이 해놓은 그림이건만, 그게 뭐 중요한가? 그걸 그릴 때의 기분이 그 초보 시절 그림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기초 수업 후 첫 작품(오른쪽 감은 선생님, 왼쪽 감은 내가 따라 그린 것
두번째 작품 : 무당벌레 (위에 선생님이 시범을 보이시면 아래에 내가 따라 색칠했다)


여러분, 취미 생활이 이렇게 좋은 겁니다. 취미는 삶의 윤활유가 아닙니다. 내 생활을 지탱하는 구심점입니다. 꼭 취미생활을 하시라고, 새로운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게 어떤 종류이건, 당신이 좋아하는 걸 찾아서 작게 시작해 보라고 권하고 싶었다.


그냥 글을 써보려고 한 건데, 그건 또 다른 흐름의 시작이 되었다.




#에세이 #화가 #작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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