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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우지니 Oct 04. 2020

그림으로 배운 자기 결정권

다른 사람과 달라도 온전하다.

"아니 그래서... 화가가 아니잖아요."
"저 화가예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아니, 전공을 안 했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어느 날 우리 집에 오랜만에 오신 손님 한 분이 거실 벽에 서있는 빈 캔버스들을 보며 혼란스럽다는 듯 오른손 손바닥으로 눈과 이마 언저리를 비벼댔다.

내게 글쓰기를 가르쳐준 선생님은 글을 쓴 사람이 작가가 아니고 글을 쓰는 사람이 작가라고 하셨다. 책을 쓴 경력이 없더라도 지금 쓰고 있다면 그것이 작가라는 말을 깊이 새기며, 글을 계속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더랬다.
그 강의를 듣고 6개월 동안 앉으나 서나 책에 관련된 생각만 하고 쓰고 고쳤다. 그렇대도 내가 스스로를 작가라고 '진짜로' 믿게 된 것은 1년이나 지나 '진짜로' 물질화된 책이 나온 후였다.

그렇다면 개인전 한 번 하지 않은 나는 언제 스스로를 화가라고 여기게 되었을까. 그것은 내가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알았을 때였던 것 같다.

언제나 그림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을 보면 누구랄 것 없이 멋져 보였다. '그리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정말 그리는 행위'를 했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부러운 일이었다.
악플에 시달리다 오랜만에 티브이에 나온 솔비는 그동안 그림을 그리며 마음을 치유했다고 했다. 그녀는 거침이 없어 보였다.
어린 시절 오랫동안 미술학원에 다녔던 나는, 그녀의 그림이 전공생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고 느꼈다. 그녀가 멋지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 생각을 말이나 글로 꺼내 표현하지 못했다. 내가 그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갑자기 권위 있는 미대 교수님이 나타나서, 당신이 평가하는 이 그림은... 하고 오디션 프로처럼 점수를 매길 것 같았다. 이 그림은 전문가로부터 공인된 걸까를 확인하지 못하자, 좋아한다는 말을 쉬이 할 수 없었다. 전문가가 인정하는 그림이어야 좋아한다고 말해도 안전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내 마음조차 스스로 고르지 못하고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그림을 배우면서 마음은 더 휘청거렸다.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이 '파뿌리'가 아닐지라도 전공자라면 누구나 연습했을 파뿌리를 나도 그릴 줄 알아야 하는 건 아닐까. 더 나아가, 그림이 너무 즐거운 내가 그림으로 인정받으려면 마흔을 코앞에 둔 지금이라도 미대에 가야 하지 않을까.

화실에서 선생님과 상의해서 고른 사진을, 선생님이 가르쳐주던 대로 그리는 것에서 벗어나, 혼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은 변하기 시작했다.


오롯이 나의 의지로 고른 사진을 보고, 칠하고 싶은 색을 골라 칠하고, 더 그릴지 지금 끝낼지를 결정했다. 매일 그렸으므로, 매일 많은 것을 결정했다.
그림이 쌓여가는 만큼 수십, 수백 개의 결정이 쌓여갔다. 그러는 동안 나는 또렷해져 갔다.
그리고 나는 화가가 되었음을 알았다. 신기하게도 작은 그림을 그리면서 쌓여간 결정권은, 내 생활 전반으로 적용되어갔다. 내가 원하는 바를,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결정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더 이상 '이 그림을 좋아해도 괜찮을까' 조마조마해하지 않는다. 보자마자 가슴을 울리는 그림이 있고, 다른 사람과 다르게 느낄지라도 그 자체로 온전하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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