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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Jun 13. 2019

항공사 승무원의 여행 방식

스탠바이 티켓으로 배우는 인생(?)


호주 국내에서의 지역 이동은 보통 항공편을 통해서 한다. 간혹 로드 트립을 하는 경우에나 자동차로 이동하지 그렇지 않고서는 항공편이 제일 싸고 효율적이다. 


내가 승무원이 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승무원들이 쓴다는 90프로 할인 티켓 때문이었다. 90프로라니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할인폭이다. 항공사마다 상호 협약 맺는 식으로 해서 다른 항공사의 티켓도 할인받아 쓸 수 있는데 우리 회사는 호주의 <콴타스>, <젯스타>와 연결이 되어 있다. 뭐 이보다 좋을 수 있으랴. 출발 단 몇 시간 전까지만 티켓을 예약하면 되고 변경하고 싶을 때는 언제나 변경 가능. 또한 해당 항공사에서 책정한 평균 항공료로 고정이 되어 있으므로 하이 시즌이든 로우 시즌이든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굳이 서둘러 일정을 픽스시킬 필요가 없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바로 좌석이 남는 경우에만 탑승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참 당연한 게, 우리보다 몇 배 이상의 금액을 지불하는 일반 승객들의 좌석 까지 내주어가며 호의를 베풀 필요는 없잖아?. 뭐 그거 말고는 완벽한 티켓이다. 가족들도 나와 같은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우리 항공사에 한해서는 친구들 까지도 할인 혜택을 받는다. 평생 승무원으로 살고 싶은 이유다. 


여하튼 3일간의 퍼스 일정을 마치고 멜버른으로 이동해야 할 때쯤 슬슬 비행기 티켓을 알아봤다. 보통 항공사 직원 전용 포털 사이트에서 티켓을 예약하는데 일정을 짜는데 날짜와 편명을 입력하면 (조금이라도 여행 계획에 도움이 되라는 의미로) 이 비행의 예약 상황을 색깔로 알려준다. 만석이 예상될 때는 빨간불, 좌석이 여유 있을 때는 초록불 그리고 상황이 애매할 때는 노란불이 뜬다. 하지만 대부분의 비행에는 <노쇼>하는 승객들이 있기 때문에 빨간불이 떠도 타는 경우가 종종 있고 노란불이면 거의 탄다고 봐야 한다. 초록불 같은 경우는 거의 누워서 간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여기에 전적으로 의지 할 수는 없다. 각 항공사마다 예약 현황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이 다른 건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끔 만석일 때도 초록불이 뜨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직접 항공사에 전화를 해보기도 하고 또 해당 항공사 승무원 중에 지인이 있는 경우는 물어보기도 한다.(승무원 들은 보통 항공편의 예약 현황을 조회해 볼 수 있다). 이번 퍼스-멜버른 구간은 노란불이 떴다. 그렇다면 안심하고 계획대로 일정을 진행하기로 했다. 도착하는 날짜와 시간에 맞춰 멜버른 호스텔도 예약했다. 그것도 제일 저렴한 환불불가 옵션으로. 


새벽 1시에 출발하는 비행이었기 때문에 10시쯤 숙소에서 나와 11시쯤 됐을까? 공항에 도착했다. 아직 일반 승객들의 체크인이 한창이었다. 처음 오는 공항의 스탭 티켓을 이용할 때는 일단 스윽 눈치를 본다. 스탭 전용 카운터가 있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고, 좌석이 여유가 있으면 미리 티켓을 주는 경우도 있고 카운터가 닫히기 전까지 무한 대기시키는 경우도 있다. 아예 좌석이 확정되지 않은 스탠바이 탑승권을 받고 일단 들어가 탑승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일단 왔다 갔다 하는 항공사 직원에게 스탭 티켓이라고 이야기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봤다. 


<일단 여기 줄 서서 체크인 카운터에 물어보세요. 슈퍼바이저가 알려줄 거예요>

<네 고마워요. 근데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지금부터) 오늘 예약 상황이 어때요?>

<지금 179명 예약되어 있어요.>


나는 움찔했다. 국내선이면 작은 기종을 운행할 텐데.. 179명이면 너무 많은데..?


<승객 정원이 몇 명이예요?>

<180명이요>

<한자리만 남아있는 건가요?>

<네. 그렇네요>

<아. (울며) 감사합니다>


속으로 <망했다>를 100번 외치며 줄을 섰다. 남은 좌석이 하나라는 말은 출발 직전까지 무한 대기할 가능성이 크고 국내선이다 보니 언제 누가 라스트 미닛에 나타나 티켓을 사 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출발 40분 전에 다시 오란다. 터덜터덜 근처에 있는 의자에 짐을 내려놓고 상황 파악을 했다. 정신 차리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플랜비를 생각해야 할 때. 일단 멜버른으로 가는 다음 항공편이 몇 시인지 알아봤다. 다행히 오전 5시 반에 다른 항공사에서 출발하는 비행이 있다. 혹시나 이번 비행 티켓을 못 받게 되더라도 4시간 반 정도만 공항에서 노숙을 하면 된다고 나름 위로하며 본능적으로 재빠르게 주변에 누울 만한 곳을 찾았다. 다행히 누울만한 곳이 몇 군데 있었다. 


국내선이라 그런지 출발 1시간 전에도 사람들이 계속 와서 체크인을 했다. <제발 그만 와>를 외치며 최대한 슈퍼바이저 직원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앉아 존재감을 드러냈다. <나 태워줄 거지?> 하는 애처로운 눈빛도 종종 보냈다. 이게 무슨 감정이냐면 한창 취업 준비할 때 있잖아. 무슨 날 몇 시에 합격자 발표가 난다고 했을 때 한 시간 전부터 초조해서 아무것도 못하는 바로 그 기분이다. 10분 전.. 9분 전... 시간이 가까워 올 수록 심장이 죄여 오고 너무 실망해서 좌절하지 않기 위해 최악의 경우까지 다 시뮬레이터 돌려보는 그런 상태. 똑딱똑딱 흘러가는 시계만 바라본다. 


시간 참 안가네. 


드디어 슈퍼바이저가 약속한 출발 40분 전이 다 되었다. 내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지만 그는 이런 내가 안중에도 없이 여전히 바빴다. 그래서 내가 다가가기로 했다. 일반 승객들은 수속을 거의 마친 카운터 앞에 슬며시 다가가자 그가 말한다. 


<아. 잠깐만요>

<네>



두근두근 두근두근 두근두근 두근두근


<여기 티켓이요>


아. 해피엔딩이었어.


이럴 땐 정말 티켓 뽑아주는 직원에게 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마음속으로 그와 그의 집안 대대 손손 3대까지 축복을 빌어주며 티켓을 받아 들었다. 좌석 번호는 전혀 상관없다. 가운데 끼여가면 뭐 어때. 이 빡빡한 비행기에 내 몸뚱이를 밀어 넣을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행복했다. 


누군가는 이런 드라마 때문에 스탠바이 티켓이 싫다고 한다. 나도 지난 4년간 두어 번 정도 카운터에 거절당한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 번도 스탠바이 여행이 싫었던 적은 없다. 승무원으로 살면서 누리는 최고의 호사지, 어찌 싫다고 말할 수가. 뭐, 다음 이동을 위해서 적당한 백업 플랜 정도는 세워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한다. 비행이 스탠바이이다 보니 여행 일정에도 완벽한 확정은 없다.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스탠바이 여행을 하면서 인생을 배운다니까. 


여하튼 나의 여행은 이렇게 계속되고 있었다. 약간의 드라마는 여행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준다. 아까까지만 해도 퍼스를 떠나는 게 너무 아쉬웠는데 지금은 퍼스를 떠날 수 있다는 사실에 이렇게 행복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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