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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May 20. 2019

할 건 없지만 떠나긴 싫어요

그래도 가야해

 해지는 퍼스의 시내와 낮달


내일이면 퍼스를 떠나 다른 도시로 가야 했다. 딱히 할 것도 없는데 왜 떠나기 싫은지 모르겠다. 그냥 이 호스텔에서 며칠 더 뒹굴거리면서 낮에 잠깐 돌아다니고 해지기 전에 돌아와 맥주 한잔하며 그냥 이렇게 며칠 더 보내고 싶었다. 다음 여행 일정은 대충 짜두었지만 예약을 해두었다거나 하는 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며칠 더 있을 수는 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딱히 할 것이 없었다.


잔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며칠 할 일도 없이 여기서 여유 부렸다간 그 이후의 일정이 다 꼬일 것이 분명했다. 한 도시에 적어도 출도착 포함 3일은 머무르려면 이제 퍼스는 떠나는 것이 맞았다. 그래서 아쉽지만 그냥 출발하기로 했다.


다음 도시는 멜버른이었다. 멜버른에 대한 큰 기대는 없었지만 그래도 호주의 대표 도시니,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아 일정에 추가했다. 퍼스에 더 있고 싶은 마음을 대충 추스르고 멜버른 비행기 티켓과 숙소 등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먼저 멜버른으로 넘어가는 비행시간을 알아보니, 이럴 수가. 새벽 1시이다. 너무나 애매한 시간. 다음날 오전 10시에 체크 아웃을 하면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 밤 10시까지는 12시간 씩이나 숙소 없이 떠돌아야 된다는 소리? 물론 체크 아웃을 하고도 호스텔에 짐을 맡겨두거나 로비에 쉴 수 있지만 제대로 쉬지도 씻지도 못한 상황에서 새벽 1시부터 밤샘 비행을 해야 하는 상황은 체력적으로 부담이 될 것 같았다. 예전에는 오히려 이런 상황이라면 숙박비 하루치 굳는 다고 좋아했을 텐데 이제는 날이 갈수록 쇠해져만 가는 내 체력이 더 걱정이다. 하루치 숙박을 연장하면 20불 정도 더 내지만 밤까지 침대에서 편하게 쉬다가 공항에 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20불을 아낄 수 있다.


전형적인 호주의 도시 모습, 고층 건물과 파란 하늘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하루 숙박을 연장하기로 했다. 요즘은 몸 컨디션이 망가지면 뭘 해도 즐겁지가 않더라고. 아무리 직장인이 되었어도 여행은 항상 빠듯하게 예산을 잡아하는 편이라서 20불 정도 하는 하루 숙박비를 더 지불하느냐 마느냐로 30분 정도 꽤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았다. 하지만 이젠 밥을 굶더라도 몸이 편한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몸이 편한 것'의 기준이 내 몸 하나 눕힐 침대 정도라는 것은 참 다행이다.


올해 서른두 살. 아직 까지 호스텔에 묵는 건 나쁘지 않은데 몇 년 더 지나면 이것마저 불편해지려나? 그런 생각을 하니 좀 쓸쓸해졌다. 그러다 '나는 몇 살 까지 혼자 떠도는 식의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얼마나 남았을까?'와 같은 쓸데없는 생각들이 약 1분간 머릿속을 휘저었다.


30대의 (남자 친구도 없는) 미혼 여성으로 혼자 여행한다는 게 맞는 건가 싶은 순간이 몇 번 있었다. '혼자 여행'이라는 것도 20대 때나 낭만적인 거지 서른둘이나 돼서 그런다는 게 초라하게 느껴졌달까. 결혼할 사람도 남자 친구도 그 흔한 '썸'도 없어 고민이 많은 시기이기도 했고. 아직도 도미토리를 돌아다니며 여행한다는 게 주책맞아 보이진 않을까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행도 언제나 그랬듯이 좋았다.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쌀쌀한 공기가 좋았고 그럴 때 마시는 커피 한잔이 좋았다. 작은 배낭에 꼭 필요한 물건 들만 담고 음악을 들으며 걷는 가벼운 산책이 좋았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마시는 맥주 한잔이 좋았다. 아직도 이런 사소한 순간 때문에 여행을 계속해나간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고민들로 여행을 그만 하기엔 여행이 주는 즐거움을 너무 많아 알아버렸다. 나도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아! 난 마이웨이야!'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아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덜 초라해 보이기 위한, 조금이라도 더 나아보이기 위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변에, 그리고 나 자신에게 더 당당한 여행자로 살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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