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에서 묵게 된 호스텔에서 같은 방을 쓰던 한국인 동생이 있었다. 나보다 하루 먼저 퍼스에 도착한 친구였는데, 내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반갑게 한국인이냐며 말을 건네길래 금세 말을 트고 친해지게 되었다. 요즘은 여행하다 보면 어딜 가도 나보다 '하안~참' 어린 친구들이 많아서 눈 깜짝할 새 흘러간 시간에 서운할 때가 많았다. 다행히 이 친구는 나보다 '쬐끔' 어렸다(휴).
29살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워킹 홀리데로 왔다는 A양. 이제 막 호주에 온 데다가 영어도 자신이 없어서 걱정이 많다고 했다. 나보다 어려도 한국에서의 사회경험은 나보다 훨씬 많았다. 그렇게 듣고 보니 어쩐지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 느낌. 회계 전공을 하고 관련 분야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유난히 그쪽 분야에 여자들이 많았고 그 특유의 눈치 봐야 하는 분위기와 기싸움에 질려 몇 번 직장을 옮긴 끝에 결국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 후로 워킹 홀리데이를 계획했고 영어 공부를 위해 이태원에서 1년 동안 일을 하며 비용과 언어 등을 준비했다고. 이태원에서 일해서 그런지 영어가 조금 부족해도 호스텔에 오가는 외국인들과 부담스럽지 않게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영어 공부만 조금 하면 호주 생활 엄청 재밌게 할 성격이겠다 싶었지.
A양이 워킹 홀리데이로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주책맞게 "나도 8년 전에 호주에서 워킹 홀리데이 했었는데!"를 외쳐버렸다. 그리고 시작된 "우리 때는 말이야~"
2011년. 중고로 산 자전거를 잘도 타고 다녔었지 (추억82)
주절주절 '내가 워홀 할 적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생각해보니 그 친구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말하는 내가 훨씬 신났었던 대화였다. 그래도 착한 친구여서 그랬는지 재밌게 들어주었다.
그리고 둘째 날, 낮에는 각자 시간을 보낸 후 저녁에 다시 호스텔로 돌아와 이야기를 하는데 그녀로부터 내일 한인 식당 면접을 보러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내가 호주에서 일을 할 때는 한인식당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많았다. 일단 호주 사장 밑에서 일하는 '오지잡'을 구하는 것이 목표인 사람들이 많았고, 호주까지 와서 일을 하는데 굳이 한식당에서 일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게다가 못된 한인 사장들이 막막한 워홀러들의 상황을 이용해 최저 시급을 훨씬 밑도는 수준의 금액을 임금으로 지급하는 경우도 많았고. 그마저도 '트라이얼'이니 '본드'니 하는 명목으로 몇 주씩 깔고 준다거나 하는 일이 허다했지. 그러다 보니 한인 식당은 이것저것 시도해보다가 정 안될 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인 사장 밑에서 만큼은 절대 일안해' 하는 워홀러도 많았으니까.
여튼 나 때는 그랬는데, 호주에 온 지 이틀 만에 한인 식당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A양의 속내가 궁금했던 거다.
"시급이 19불이래요."
"뭐!!??"
한인 식당 시급이 19불이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이해가 안됐다. 지난 8년 동안 호주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실 그때 당시도 최저 시급이 15-16불 정도는 됐었다. 하지만 적정 임금을 주는 한인 식당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10-11불을 받으며 일했다. 도대체 지금은 어떻게 19불을 받을 수 있는 거야?
A양의 설명은 이랬다. 호주 달러가 800원대로 떨어지면서 호주로 오는 워홀러가 상당히 줄었다는게 첫번째 이유. 또한 예전에는 워킹 홀리데이를 할만한 나라가 호주밖에 없어서 호주로 워홀러들이 많이 몰렸던 것도 있다. 물론 다른 몇몇 나라도 한국 워홀러를 받긴 했지만 인원이 제한되어 있어서 워낙 경쟁이 치열했었지(특히 캐나다는 선착순으로 접수를 받아 우체국 앞에서 밤새는 일도 있었더랬고). 지금은 선택지가 많으니 굳이 호주로 올 필요가 없는 거다.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그간 참 많기도 했고. 여하튼 그런 이유로 10불, 11불을 줘도 쓸 사람이 넘쳐났던 예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이번 여행 중 멜버른에서 만났던 워홀러들에게도 이야기를 들었는데 대부분 19불-20불을 받으면서 일하고 있더라.
이런 이야기를 듣고 보니 괜히 다른 일 구한다고 스트레스받지 말고 아직 영어도 부족 하니 한인 식당에서 일하면서 적응하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다음날이 트라이얼이라는데 잘하고 오기를 빌어주며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퍼스에서의 마지막 날이라 시내를 돌며 기념품도 사고 미술관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거리를 사서 호스텔에 돌아왔다. 혹시나 A양이 있나 두리번거리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매일 밤 함께 이야기했던 그 테이블에 앉아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표정이 뭔가 안 좋은 것이 면접 본 것이 잘 안됐나 싶었는데 모르는 체 하고 물어봤다.
"어떻게 됐어?"
A양이 대답하기를, 트라이얼을 3시간 정도 했고 매니저가 본인을 무척 맘에 들어했으며 호주에 오자마자 일을 구하게 돼서 좋겠다는 식의 이야기를 해서 당연히 합격했다고 생각했다 한다. 사장님과 이야기해보고 연락 준다기에 그런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같은 구인 공고가 그녀가 트라이얼을 끝난 직 후 다시 올라왔다고. 나는 사람이 더 필요할 수도 있고, 착오가 생겨 글이 한번 더 올라간 걸 수도 있으니 불안해하지 말고 기다려봐라 했으나 그녀는 이미 절망한 듯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호주에서 해보고 싶을 일들을 조잘조잘 이야기했던 그녀가 오늘은 한국에 갑자기 가고 싶단다. 그 마음 왜 모르겠니. 난 호주에 온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한국 가는 날만 기다렸어.
그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그런 이야기를 한 후 난 퍼스를 떠나야 했기 때문에. 사실 구인 공고가 다시 올라온 건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식당 측의 착오일 수도 있고 인원이 더 필요한 거였을 수도 있으며 그저 몇 명의 지원자를 더 보고 싶었던 것 일 수도 있다. 잘 된 거였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만 지금도 가끔 한다. 한국에서도 구직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인데 외국에서 일을 구한 다는 것은 그것의 몇 배나 되는 큰 일이다. 있던 자신감도 없어지고 이유 없이 사람을 작아지게 하는 일. 그때 그 마음이 생각나 왠지 짠했다.
참 이상한 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A양이 부러웠다. 상황만 본다면 난 돈을 '벌러' 온 게 아니라 '쓰러' 온 여행자인 데다가 매달 월급이 나오는 안정적인 직장도 있는데 말이야. 왜 그렇게 그녀가 부러웠는지 아직도 모를일이다. 나도 이미 걸어 본 길이고 쉬운 길이 아니라는 걸 아는 데.
호주에 눌러 앉고 싶은 마음을 추스르고 짐을 챙겼다. 아마도 여행 하는 내내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