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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May 09. 2019

혼자 고상하게 여행하는 법

미술은 교과서로만 배웠어요


나는 여행할 때 무료로 입장 가능한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있는지 미리 찾아보는 편이다. 특히 혼자 여행할 때는 더더욱. 사실 어떤 여행지든 마음 잘 맞는 친구나, 같이 뭘 해도 좋은 남자 친구와 있다면 여행 일정을 느슨하게 짜는 것이 훨씬 좋다. 햇빛 좋고 바람 좋은 야외에 앉아 커피만 마셔도 좋은 것이 여행이기 때문에. 하지만 혼자는 다르다(진지). 여행하는 매 순간이 드라마틱하고 흥미롭진 않기 때문에 문득문득 무료해지다가 급기야 우울해지기까지 해지는 중간중간의 틈을 잘 메꿔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일정을 빡빡하게 채우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뭘 해야 할지 몰라 멍하게 있다가 허무한 기분을 느끼는 건 더 싫다. 호주 여행은 더 그랬다. 딱히 흥미로운 볼거리가 넘쳐나는 여행지는 아니기 때문에 그런 순간을 대비하기 위한 플랜이 필요했다. 그럴 때 괜찮은 전시를 방문하는 건 참 적당하면서도 있어 보이면서도 시간을 의미있게 보내기 좋은 일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우리는 예술이나 전시에 커다란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온 평범한 한국인이기 때문에 관심 없는 전시에 입장료를 내는 것은 잘 내키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어느 도시를 가든 잘 찾아보면 무료 전시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호주에 살면서, 또 여행을 하면서 좋았던 건 호주에는 무료입장 가능한 대형 미술관, 박물관이 참 많다는 것이다. 입장료가 항시 무료인 경우도 있고 도네이션으로 받는 경우도 있으며 특정 요일, 특정 시간대에만 무료인 경우도 있다.  


나 같은 경우에 박물관은 정말 관심 있는 주제가 아니라면 아무래도 좀 지겨운 편이라 패스할 때도 있지만 미술관은 꼭 방문해보는 편이다. 교과서로만 미술을 배운 사람이라 제대로 아는 건 없지만 그래도 미술관을 둘러보는 일은 재밌다. 무료입장이 가능한 미술관일수록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화가의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보는 일은 스마트폰, 와이파이, 블루투스, 배터리 충전 등의 온갖 잡다한 디지털 기기들에서 벗어나 단 몇 분이라도 나를 단순한 아날로그 여행자로 만들어 준다. 그래서 좋다. 



퍼스에는 시티 중심가에 <아트 갤러리 오브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가 있다. 항시 무료입장이 가능하지만 어느 미술관이 그렇듯 특별전은 따로 입장료를 내야 할 때가 있다. 이 곳에선 서호주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특히 현대 미술 중에 관심이 가는 작품들이 많았다. 이렇게 말하면 '예술 좀 아나?' 싶겠지만 전혀 모른다. 그림들 앞에서 한참 동안 머물며 내가 하는 생각이라곤 

-색감이 너무 이쁘다. 저런 색깔 내 피부에 잘 받겠다

-저런 색 커튼이 있음 내 방에 딱인데

-선을 어떻게 저렇게 반듯하게 그렸지?

-자대고 그렸나?

따위의 단순한 것들이다. 그것마저도 돌아서면 다 잊어버린다는 사실. 



가끔 우연히 맘에 들었던 그림 몇 점들이 다 같은 화가의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소~오름 까지는 아니어도 이런 게 그림 보는 재미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작품들을 감상하다 슬슬 지겨워지면 미련 없이 전시장을 빠져나온다. 하지만 여기서 미술관 관람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여기서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바로 기념품 쇼핑. 대부분의 전시장 출구에는 기념품샵이 있다. 전시 관람보다 더 신나는 기념품 쇼핑. 무료로 예술을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입 싹 닦고 그냥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도네이션도 좋지만 나도 좋고 미술관에도 좋은 일을 해보자. 


보통은 맘에 들었던 그림과 관련된 엽서나 수첩 등을 산다. 가끔은 정말 그림 보는 시간보다 기념품에서 쇼핑하는 시간이 더 길 때도 있다. 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딸린 기념품샵을 구경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일반 시내나 공항에 있는 기념품샵에 있는 흔하고 전형적인 제품들과는 다른 좀 더 감성적이고 특이한 기념품들을 볼 수 있다. 



<아트 갤러리 오브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현대 미술을 많이 전시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Day time moon>이라는 작품을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공기 좋은 호주에서는 정말 자주 봤던 해지기 전 낮달의 모습. 하늘색 같은 것도 같고 회색빛인 것도 같고 분홍색인 것도 같은, 옅은 하늘에 하얗게 떠있는 보름달의 모습이 너무 예뻤지. 여하튼 관람을 마치고 기념품샵에 내려와 나의 유일한 여행 수집품인 엽서를 고르는데 몇 종류 안 되는 소장 작품 엽서 중 딱 그 작품이 있었다. 이땐 정말 소~오름이 돋았다니까. 말해 뭐해? 바로 결제하고 가방에 고이고이 품었다. 단 돈 1불이 주는 크나큰 행복. 별로 한 것도 없지만 왠지 오늘도 알차게 잘 보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매우 뿌듯했다. 


고상하게 예술 활동을 해주었으니 이제 그늘 좋은 곳에 누워 아이스 라테를 마시며 노래나 들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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