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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May 01. 2019

호주가 좋았던 이유

격하게 아무 것도 안하기

퍼스 시내 전경과 낮달.


지난밤, 거의 눕자마자 잠에 들었다. 평소에는 쉽게 잠에 드는 경우가 거의 없다. 매일 밤낮이 뒤바뀌는 비행일을 하기 때문인지 잠에 드는 것도 일이 되어버렸다. 오후에 웬만하면 카페인을 피하는 건 당연하고 원래 잠에 들어야 하는 시간보다 늘 한두 시간씩 미리 눕는 편이다. 그럼에도 매번 그 이상 뒤척거리다 겨우겨우 잠에 들 곤 한다. 또 귀는 얼마나 예민한지. 옆집 문 여는 소리, 엘리베이터 열리는 소리 등에도 무척 까탈스럽고 예민하게 반응하게 됐다. 


그러다가도 여행만 오면 항상 잘 자고 잘 일어난다. 혼자 쓰는 싱글룸이 아니라 도미토리에서는 소음, 불빛 등 내 맘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웠다 하면 잠이 솔솔 오는 기분 좋은 느낌으로 잠에 든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상쾌하게 잠에서 깨는 것도 너무나 행복한 일. 


열몇 시간 비행 한 피로를 깔끔히 풀고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은 퍼스 시티를 돌아볼 예정. 퍼스에는 시티 내부를 연결하는 무료 셔틀버스 '캣버스'가 있다고 들었다. 좀 더 찾아보니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캣 버스 정류장이 있더라고. 기대도 안 했는데 아주 잘됐지 뭐야. 아직 낮에는 기온이 높디는 얘기를 듣고 옷은 최대한 가볍게 한 후 길을 나섰다. 따가운 햇살을 맞으며 조금 걷다 보니 어렵지 않게 캣버스 정류장을 찾을 수 있었다. 혼자 여행을 하는 게 매번 신기할 정도의 길치인 나는 이런 순간 매우 감격스럽다. 


버스 정류장에 설치된 전광판에는 다음 캣버스가 5분 뒤에 도착한다고 쓰여있었다.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목에 걸고, 이어폰을 꺼내 휴대폰에 연결한 후 플레이 리스트를 왔다 갔다 하며 좋아하는 노래를 찾아 틀으니 벌써 저 멀리서 파란색 버스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대충 퍼스 시내에서 내려야지 생각하고 캣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비는 운전기사님과 주고받는 눈인사로 대체. 생긴 건 시내버스랑 똑같은데 이렇게 무료로 태워준다니 놀라울 따름. 특히 호주는 교통비가 비싸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는데 말이다. 친절하게도 버스 입구에는 캣버스 맵이 비치되어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참 신기하다. 시내를 도는 무료 셔틀버스가 있다니. 


사실 여행자 입장에서 그 지역에 로컬 버스를 타는 것은 꽤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복잡한 노선, 어려운 버스 번호, 안내 방송이 제대로 제공되지 않는 점 등 여행자를 당황하게 할 때가 많기 때문에. 하지만 캣버스는 번호 대신 메트로처럼 4개의 노선이 있고 레드, 옐로, 블루, 그린 이런 식으로 노선을 컬러로 표시해 두기 때문에 관광객들도 어렵지 않게 이용 가능하게 해 두었다.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다니까.


파란 하늘과 고층 건물. 


엘리자베스 퀴(Quay)에서 내렸다. 엘리자베스 퀴는 캣버스의 환승 정류장이기도 하고 공항버스 정류장이기도 하다. 퍼스 시내에서 뭘 해야 하는지 딱히 찾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히 중심가로 오면 되겠지 싶어 이 곳에서 내렸다. 날이 얼마나 깨끗한지, 하늘이 눈이 아플 정도로 파랗다. 햇빛이 너무 뜨거워 민소매 위에 걸쳤던 남방을 벗어버렸다. 두바이에선 이러고 다녀본 적이 거의 없지만 생각해보니 호주에선 이렇게 다니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내가 뭘 입든 힐끔거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깃털처럼 기분이 가벼워졌다. 고층 빌딩과 파란 하늘 초록 잔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깔끔한 도시, 파란 하늘, 뜨거운 햇살, 시원한 그늘, 반바지와 플립플랍.. 


작은 섬을 연결하는 다리와 동화에서 나온 듯한 예쁜 회전 목마


시내에 특별히 대단한 볼거리가 없을 거라는 건 알았다. 호주 속의 런던을 느낄 수 있다는 <런던 코트>는 유럽을 대충 흉내 내놓은 상점 거리였다. 10초 만에 관광을 끝내고 나왔다. 엘리자베스 퀴도 사실 근처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이 되어 잠시 산책하거나 낮잠을 자는, 혹은 근처 주민들이 운동을 하러 오는 곳쯤이지 관광객을 사로잡을 만한 어떤 건 없었다. 사실 호주는 어딜 가도 그렇다. 유럽에서 처럼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랜드마크는 몇 안된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호주와 사랑에 빠지는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서. 그냥 커피를 마시거나, 걷거나, 길거리에서 샌드위치를 먹거나, 낮잠을 자는 일들을 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엘리자베스 퀴에서 낮잠을 자는 퍼스 주민과 기념품 상점 거리쯤이라고 생각하고 지나가면 되는 런던 코트.


뜨거운 햇살을 피하려 그늘에 앉으니 갑자기 노래가 듣고 싶어 졌다. 여행만 오면 항상 <짙은>의 노래가 생각나는데 이런 날에는 <동물원>이 딱이다. 플레이 버튼 누르자 이 노래와 풍경과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그늘이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앉아 있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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