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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Apr 06. 2021

Ep.8_퍼스의 노바디, 구직 대작전(2)

매일매일 나를 달랠 무언가가 필요했다


20191024



저녁에 가족모임이 있다며 어머니랑 나갔던 켈리는 11시가 가까워 돌아왔다. 가족들이랑 가라오케에 갔다 왔다는 그녀는 한껏 상기되어 미처 부르지 못한 노래들을 마저 흥얼흥얼 댔다. 흐뭇하다가도, 외로움이 밀려오는데 켈리의 어머니로부터 선물을 전해 받았다. 알록달록한 꽃무늬에 제법 큰 액자였다. 가족사진을 넣어 집을 향한 그리움을 달래라는 그녀의 메시지.


안 그래도 2시간 전 엄마와의 영상통화에서 훌쩍인 후였다. 하루 종일 이력서를 내느라, 쉬면서도 메일함과 문자를 계속 확인하느라 지쳐있는 중에 전화를 받았다. “재미 좋아?” 오랜만에 본 아빠의 질문에 “재미 좋긴, 재미 안 좋아 백수라서... 그래도 잘 지내~” 엄마에게도 괜히 툴툴거렸다. 그냥 잘 지낸다고 하면 될걸.


타지에 있는 것만으로도 매 순간 걱정이고 안쓰러운 마음이 가득한 걸 모르는 게 아닌데. 자식은 내리사랑에는 어쩔 수 없는 천덕꾸러기인가 보다. 그러다 매번 침대 밑에 있어 볼 수 없던 하늘이를 오랜만에 보니 참고 있는지도 몰랐던 눈물이 터졌다. 카메라를 천장으로 돌려놓고 눈물을 훔쳤는데, 다 들켰겠지... 활짝 웃으며 잘 자라고 인사하는 엄마에게 울음을 꾹꾹 참고 인사를 겨우 건네고는 종료 버튼을 급하게 눌렀다. 매번 엄마에게 종료 버튼을 양보했던 나였는데... 그 후 잠시 좀 더 훌쩍거렸다.


Home sick... 언제쯤 무뎌질까!









가끔 메모장에 일기를 적었는데, 이때의 기록이 처음이다. 낯선 곳에서 어느 정도 살만해지기까지 어떤 기록을 남기기가 버거웠나 보다. 조금 살만해지니  다른 관문이 찾아왔을 테고, 그때는 쓰지 않는 것이  버거운 상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하던 시절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마음이 답답할  무작정  내려가는 습관. 그렇게 하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본래 속상한 일이 있을  누구에게 털어놓지 못하 내게 아주  맞는 해소법.



타지에서 힘든 일을 내색하는 건 더욱 조심스러웠.  그래도 항상 걱정덩어리인데, 멀리 떨어진 곳에서 힘들어하는 딸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어떨까 떠올려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디선가 티를 내고 말았겠지만. 출국하던  엄마와의 이별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이 그렁그렁 차오르는 것만 같. 딸을 멀리까지 보내 고생시키는  같다며 결국 눈물을 터뜨리던 엄마.    훨씬 많은데도 자꾸만 못해준 것을 미안해하던 엄마. 그렇게 우리 모녀는 마지막 순간에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멀리 떨어지고 나서는 매일같이 영상통화를 하며 대부분의 순간 활짝 웃었다. 평소 애교도 잘 부리지 않던 딸이었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부모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최선을 기울여야 했다. 허나 영상통화를 하는 그 순간이 나의 일상  가장  위로이기도 했다. 언제든  편인 누군가의 웃는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주고받는 . 다 내려놓고 싶다가도 다시 모든 것을 움켜쥐게 했다. 새삼스레 기술에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같이 사는 켈리의 어머니 또한 만날 때마다  마음을 걱정하고 위로해주었다. 그녀는 유학생으로 시작해서 그곳에 정착한 이민 1세대였다. 가족과 친구, 떠나온 곳을 그리워했던 때가 생각 나서였을까. 그녀가 선물한 액자를 받아 드니 울컥하는 마음을 누를  없었다. 액자는 알록달록한 꽃무늬에  취향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그것이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었다는   중요했다. 출국  선물 받은 사진  장을 끼워 침대 협탁에 올려놓았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활짝 웃고 있는 나, 과거의 내 모습을 그리워하며 현재의 나를 달랬다.



매일매일 나를 달랠 무언가가 필요했다어느샌가부터는 일어나면   공터에 나가 달렸다. 호주의 햇빛은 생각보다 아주 많이 뜨거워서 정오 전이 아니면 달리기 힘들었고, 그마저도 나무 그늘 아래에서만 달릴  있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나무 그늘 아래 푸른 잔디 위로 길고 좁은 타원을 반복해 그렸다. 그것이 조금 지겨워지면 사우스 퍼스로 가 스완 강을 따라 걸었다. 우리로 치면 한강 공원과 같은 곳이었는데, 비둘기 대신 말로만 듣던 블랙 스완을 심심치 않게 보았다. 차로 얼마 달리지 않았도 닿을 수 있는 가까운 해변을 찾아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기도 했다. 매주 수요일 저녁에는 하우스 메이트 다니던 요가 스튜디오를 함께 찾았. 아직 수입이 없는 처지였지만 마음을 위해 큰맘 먹고 한 투자였다. 몸의 밸런스가 맞춰지면 마음의 밸런스는 자연스레 맞춰진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살살 달랜 마음으로 책상에 앉아 이력서를 넣는 일도 반복했다. 경력이 없는 분야인 옷가게, 신발가게, 호텔에도 지원을 했다. 그러나 어디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다시 강사 경력을 살려보자는 생각으로 한국어 학원에도 지원했지만 그곳에도 내 자리는 없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한인 카페에 접속했다. 나보다 한 달 정도 늦게 호주에 온 한국인 친구는 벌써 한인 카페에서 일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였다. 먼저 워홀을 다녀온 친구가 '믿고 거르는 한인 잡'이라고 했던 것이 머리에 맴돌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한국에서 환전해 온 돈이 부족해 추가로 환전한 돈마저 점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마침 집 근처 쇼핑몰 안에 있는 한식당에서 웨이트리스를 구하는 공고를 발견했다. 그곳을 포함해 몇 군데에 지원을 하고 연락을 받은 것은 바로 그다음 날이었다.



'안녕하세요. 00 000점입니다. 오늘 인터뷰 가능하세요?'



그렇게 10월의 마지막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만의 일이었다. 가지고 있는  중에 제일 깔끔한 옷을 골라 입고 집을 나섰다. 면접은 5분이나 봤을까. 매니저님은 비자 만료일과 사는 , 그리고 출퇴근 수단에 대해서 물으셨다. 그게 다였다.  웃으시고는 별로 어려운  없는 일이라며 3 정도 트레이닝을 해보자 하셨다. 유니폼과 앞치마, 메뉴판 등을 받고는 식당에서 나왔다. 그렇다. 드디어 나는 일하는 사람이  것이다.  달을 기다렸는데 5 만에 일을 하게 되다니. 조금 허무한 마음이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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