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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Jul 06. 2021

Ep.15_진퇴양난, 그리고 로트네스트.

환장하는 상황에서 방문한, 쿼카가 사는 환상의 섬.

꼼짝할 수 없었다. '약도 다 떨어져서 사러 가야 하는데...' 머리는 몸을 있는 힘껏 일으키지만, 몸은 꿈쩍을 않는다. 이불 밖으로 몸을 조금만 내어 놓아도 으슬으슬 춥고, 온몸이 두드려 맞은 듯 아팠다. 한 달 만에 제대로 쉬게 된 후 벌어진 일이었다. 그간 새로운 곳에 적응하느라 했던 긴장이 풀리면서 그때 껏 받아 온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밖으로 한꺼번에 표출해내는 것 같았다.'이게 얼마만의 여유 있는 휴무인데 이렇게 흘려보내다니...' 강력한 중력에 티끌같이 작은 인력은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3일을 내리 앓으며 누워있을 뿐이었다.


3일째 오후가 되니 몸이 조금 일으켜졌다. 허나 언제 또 안 좋아질지 모르니 다 떨어진 약을 사러 밖을 나서야 했다. 약국이 있는 마트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가 걸렸다. 뙤약볕에서 걷는 일은 언제나 인내심을 요하는 일인데도, 오랜만에 볕을 쬐며 걸으니 오히려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 들었다. 광합성의 힘인가. 약을 사고 간단한 장을 봐 들어왔다. 켈리가 저녁을 먹고 들어온다는 연락을 해왔다. 언젠가부터 그녀가 늦는 날은 맘 놓고 한식을 해 먹는 날이 되었다. 그녀도 내가 해주는 한식 요리들을 좋아라 했지만, 매일 먹고 냄새를 맡기에는 역시 이국적인 요리였을 것이다. 그렇게 된장찌개를 끓이고 김치를 잘라 꺼내 놓았다. 계란 후라이도 밥에 얹었더니 완벽한 보양식이 완성되었다. 오랜만에 밥다운 밥을 허겁지겁 먹으니 땀도 줄줄 흘렀다. 그렇게 전투적인 저녁식사가 끝나고 고요가 찾아왔다.


그리고 힘께 찾아온 건 '잘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 이곳에서의 생활도 6개월이 다 되어가는데, 얻은 것보다 잃은 것에 초점이 맞춰져 갔다. 만나지 못하는 가족과 강아지들, 배려와 웃음을 나누며 하던 일과 동료들, 좋아하는 단골 카페와 식당들, 그리고 마음의 고향인 제주도. 분명 이곳에 그것들을 대체하고 메꿀만한 좋은 친구들, 맛있는 커피와 음식들, 풍경이 좋은 자연이 있음에도 마음은 언제나 어느 한쪽이 비어있는 듯했다.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 아니면 돌아가야 할까.'



"서로를 위해 더 잘 맞는 상대를 찾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카페 매니저의 기대의 부응하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녀의 맘에 들기에는 영 역부족이었다.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를 내어 일했지만 언제나 느긋함을 지적받았고, 서투름이 반복되자 그녀의 인내심도 다해갔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시간이 점점 더 즐겁지 않았고 얼굴에 가득하던 웃음 또한 사라져 갔다. "능숙하고 실력 있는 바리스타가 필요해요. 시간 안에 해내실 줄 알아서 뽑았는데 생각보다 걸리네요. 우리가 기준이 높은 건 맞아요. 여기서 배운 걸로 다른 곳에서 일하면 아마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거예요. 다른 곳에서 일하실 때까지는 일주일에 한, 두 번 일하시는 걸로 하고, 일 구해지면 언제든 얘기해주세요."


완곡한 해고 통보였다. 몸과 마음의 힘이 다해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려던 참에 먼저 말을 꺼내 주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앞으로가 막막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떻게 들어온 카페고, 어떻게 익힌 일인데. 지난 근 두 달간의 시간이 떠오르며 다시 그 과정을 겪는다고 생각하니 까마득했다. 카페에 집중하여 일한다고 식당일도 그만둔 터였다. 게다가 마지막에 사장님이 나를 붙잡으며 정규직 매니저 자리까지 제안해오셨는데도 뿌리치고 나온 탓에 돌아가는 것도 쉽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말 새로운 곳에서 일할 기운이 1도 남아있지 않았다. 진퇴양난의 상황.

    


'지니, 로트네스트 섬이라도 가볼래?' 켈리가 나를 위로하며 물었다. 로트네스트,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동물이라는 '쿼카'가 사는 섬. 퍼스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였다. 일 때문에 여행을 무한정 미루고 있던 내겐 아주 달콤한 제안이었다. 마침 시간도 생겼겠다, 모아논 돈도 조금 있겠다, 하루 안에 갔다 올 수 있는 곳이라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회복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퍼스 역에서 기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프리맨틀의 항구에서 로트네스트로 가는 페리를 탔다. 페리는 전날 인터넷에서 예매해서 조금 싸게 구매할 수 있었다. 찾아보니 로트네스트도 규모가 꽤 있어서 걸어서 다 돌기에는 무리가 있고, 보통은 자전거로 주변을 둘러본다고 했다. 그러나 당일치기로 온 여행이라 좀 촉박하기도 하고, 쉼을 즐기기로 한 터라 자전거는 다음을 기약했다.. 그저 여러 해변 중 한 곳을 골라 수영을 하기로 하고 장소를 물색했다.



우리가 선택한 곳은 '핑키 비치(Pinky Beach)'. 핑크색은 안 보이지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에메랄드 빛의 바다. 급 떠나오지만 않았다면 스노클링 장비를 챙겨 왔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내게는 수영복이 있었다. 가끔 집 앞의 체육센터의 수영장을 찾곤 했지만 바다 수영은 처음이어서 더 신이 났다. 아이 차가워라. 해가 그토록 쨍쨍한 것에 비해 찬 수온이 신기했다. 그렇다고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벌벌 떨면서도 물속의 자유로움을 온몸으로 즐기며 첨벙첨벙 대었다. 해변 앞에는 숙박할 수 있는 세련된 호텔과 레스토랑도 있었다. 페리 선착장 근처에서 보았던 글램핑 느낌의 숙소와 민박 느낌의 숙소와는 또 달랐다. '다음에 또 올 때는 저기서 1박 이상은 해야겠군'하며 반드시 다음을 또 오겠다는 다짐을 했다.


물놀이 후에는 피시 앱 칩스와 토닉워터를 마시고 모래사장에 누워 햇빛을 양껏 받으며 여유로움을 만끽했다. 햇빛에 피부가 얼마나 타는지, 수영복을 입은 나를 어떻게 보든지 신경 쓰지 않는 시간이었다. 물속에서나 물 밖에서나 자유로움만이 나를 맞았다. 그러다 나를 자유에서 꺼낸 것은 프리맨틀로 돌아가는 페리 시간이었다. 가기 전 행복한 쿼카들을 열심히 찾았다. 분명 도착했을 때는 많이 보이던 녀석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발견된 몇 녀석마저도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었다. 귀여움이 지나친 녀석들... 쿼카에게도 나른한 오후 시간임을 알지만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셀카도 함께 찍었다. 신나게 자유를 만끽하느라 고단했는지 집으로 향하는 페리 속에서는 꿀 같은 단잠에 빠졌다. 집에 도착하니 어느새 어둑해진 밤, 해를 많이 머금은 피부가 무척이나 화끈거렸다. 그러나 손에 꼽도록 기분 좋은 밤이었다. '왜 진작에 즐기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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